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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7 PM
Anyone in the world

우리가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진정한 불변의 진리일까요?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우주가 돌고 있다고 믿고 있던 시절에 사실은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이라고 외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라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지만, 당시를 상상해보면 그들은 아마도 저희 학교를 돌아다니시던 그 여성분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 바꿔서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완벽한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 중에도 하늘이 지구 주변을 돈다는 천동설과 같이 실제와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지난 과학사에 적지 않게 일어나왔습니다. 


무엇인가가 탄다는 것, 즉 화학적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물질이 산소와 반응하여 열과 빛을 내는 현상입니다. 물질이 타기 위해서 산소가 공급되어야 하는다는 사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과학상식입니다. 하지만, 천동설을 믿었던과 같이 연소반응을 완전히 다른 식으로 이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7세기 후반의 연금술사들은 물질이 불에 타고나면 그 형체가 거의 다 사라지고 재만 남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분명, 불에 탄 후 물질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이 사라져버리니 연소반응 중에 물질로부터 무엇인가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슈탈(G.E. Stahl, 1660-1734)이라는 초기 화학자가 이렇게 사라지는 물질을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리스어로 ‘타다'라는 의미인 ‘플록스(phlox)’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슈탈은 연소가 가능한 물질은 내부에 플로지스톤을 갖고 있으며, 플로지스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연소반응을 일으킨 후, 사용된 플로지스톤은 기체가 되어 물질로 부터 빠져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연소된 후에는 적은 양의 재만 남게되니 물질 내부에 플로지스톤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할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연소반응후 재밖에 남지 않는 모습에 대한 매우 직관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플로지스톤 이론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편적 과학상식으로 받아들여진 플로지스톤의 존재는 1774년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에 의해 산소(oxygen)가 발견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산화 수은에 볼록렌즈를 이용하여 빛 에너지를 모았더니 기체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플로지스톤설에 의하면, 모든 기체는 불이 붙는 것을 방해합니다. 물질이 연소하면서 연소에 사용될 에너지를 다 잃어버린 플로지스톤이 기체상태로 공기중으로 방출됩니다. 기체는 이렇게 에너지가 없는 플로지스톤으로 포화된 상태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연소를 방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는 촛불을 더 잘 타게 하는 성질을 갖는다는 것을 관찰한 프리스틀리는 이 기체를 ‘탈 플로지스톤' 기체라고 불렀습니다. 산소가 처음부터 산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플로지스톤 이론에 전혀 부합되지 않은 기체를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리스틀리는 그 기체가 매우 특이한 것일 뿐, 플로지스톤이론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시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되었고, 이를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일화의 중년의 여성분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와 같이 과감히 플로지스톤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과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탈플로지스톤'이라는 기체에 산소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Lavoisier, 1743-1794)였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서, 연소반응은 플로지스톤이 물질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소라는 기체가 입자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이 기체가 바로 프로스틀리가 이야기한 탈플로지스톤 기체의 정체일 것일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라부아지에 역시 산소 기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소반응이 플로지스톤이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산소가 물질과 결합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그는 연소반응을 산성 물질과의 반응과 같은 것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덕분에 ‘산과 반응하는' 이라는 의미의 산소(oxygen)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것입니다. 이렇게 2% 부족한 발견 덕분에 이미 보편적 진리로 자리 잡아버린 플로지스톤 이론을 단박에 뒤집지 못하고, 이후로 연소 반응의 산소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어쨋든, 현재는 화학이나 과학사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드물 정도로 잊혀진 이론이지만, 당시에는 일 더하기 일이 이인 것과 같은 수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이론입니다. 


이외에도 과학사에는 이렇게 보편적 패러다임을 송두리채 바꿔버리는 사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의 저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이러한 사건들을 과학 혁명이라고 불렀으며, 우리의 과학사는 이와같은 혁명에 의해 발전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보편적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은 언제든 혁명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과학은 다음 레벨로 진일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질문드렸듯이 지금 현재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 중에 백년, 이백년뒤 후손들은 들어보지도 못할 그런 과학적 지식들은 과연 없을까요? 그런 불안한 진리를 참이라고 고집하기 위해 서로 힐난할 필요가 있을까요?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리하게 반복되는 실험과 긴 시간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한 결과로 증명된 이론이 불가침의 진실이라고 본인 자신은 믿는다 해도 ‘나는 나의 지적 논리를 통해 얻어진 나의 결론이 아직까진 가장 우수하고 옳은 결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충분한 논거로 반론을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이를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다. 또한 완벽한 논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해도, 지금 내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타인의 주장에 대한 가능성도 무시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라는 마음가짐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삶의 곳곳에서도 내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무엇이 참이 아닐수도 있다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 사회에도 싸워야할 일들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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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6 PM
    Anyone in the world

    “To every action there is always opposed an equal reaction : or the mutual actions of two bodies upon each other are always equal, and directed to contrary parts.”


    “모든 힘은 반대 방향으로 동일한 크기의 반작용 힘을 갖는다 : 즉, 두 물체에 서로 작용되는 한 쌍의 힘은 언제가 동일한 크기이며 반대 방향을 향한다.”


    기억이 나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물리 수업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뉴튼의 역학법칙 중 제 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위에 영문은 실제 논문에 뉴튼이 직접 서술한 원문입니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우스갯 소리로 물리를 포기하게 만든 법칙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실제로 뉴튼의 세가지 법칙 중 가장 뜻이 모호하게 들리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 법칙을 처음 배웠을 때,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며칠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법칙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힘의 근본적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힘(Force)’이란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두 물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물리량입니다. 세상에 물체가 하나밖에 없다면 힘이라는 것이 애초에 정의가 불가능해 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힘을 ‘가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두 물체가 서로 ‘주고 받는' 힘으로 오해합니다. 마치 A가 B를 주먹으로 한대 때렸더니 화가난 B가 다시 A를 밀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작용, 반작용의 힘은 이렇게 주고 받는 힘이 아닙니다. 억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만약 A가 주먹으로 B의 복부를 때렸다면, 이는 B가 자신의 복부를 이용해서 A의 주먹을 때린 것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라는 것이 작용, 반작용에 더 적합한 비유입니다. 어릴적 선생님들이 사랑의 매라시며 회초리를 드시고는 너희들을 때리느라 내 손도 매우 아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 많은 엉덩이로 선생님이 쥐고 있는 회초리를 너무 많이 때려서 그렇다는 말씀이신 것이지요.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입니다.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합니다. 분명 계란을 힘껏 던졌지만, 계란이 박살이 납니다. 계란과 바위 사이에 생기는 힘은 계란이 바위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며, 동일한 크기의 힘이 계란과 바위에 동시에 전달됩니다. 바위는 멀쩡하고 계란이 깨지는 건 단지 계란이 바위보다 약하기 때문일 뿐, 그것이 바위가 계란에게 더 큰 힘을 준 것은 아닙니다. 엊그제 일식(eclipse) 현상을 일으킨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을 하는 것은 잘 알고 계시다시피 지구가 중력(force of gravity)을 가하여 달을 잡아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구가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달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크기의 힘으로 말입니다. 같은 힘으로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데, 지구가 달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달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은 단지 달이 지구에 비해 매우 가볍기 때문입니다. 만약 달의 무게가 지구만큼이나 무겁다면, 지구가 달 주변을 도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쌍성(binary stars)이라는 항성계가 있습니다. 두개의 별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서로 중력에 의해 잡아당기는 계입니다. 마치 지구와 달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별, 즉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하나의 별이 다른 별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8자를 그리며 두 별이 함께 공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서로가 함께 만들어 내는, 그래서 서로에게 동시에 같은 힘이 걸린다고 해석할 수 있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 의한 현상들입니다. 


    어릴적 운동회가 열리면 이어달리기와 함께 운동회의 백미를 장식하던 것은 줄다리기였습니다.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긴 동앗줄을 잡아당기며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가 생각납니다. 줄다리기에서 줄 양쪽에 매달린 학생들이 잡아당기는 힘을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설명해 보자면, 줄을 잡아당기는 힘은 한쪽 팀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두 팀이 함께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힘을 A팀이 B팀에게 가하는 것이며, 동시에 B팀이 A팀에게도 가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야?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만약 한쪽 팀은 전혀 줄을 잡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반대쪽 팀만 줄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해보시면, 잡아당기는 힘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튼의 요상한 물리 법칙을 줄다리기를 이용해서 이해하려는 순간 더 이해가 안가는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양쪽이 줄을 잡아당기는 힘을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 두 힘이 서로 같을 수 밖에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쪽 팀이 줄다리기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일까요?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동일한데, 왜 한쪽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해답은 두 팀에 상호작용되는 작용 반작용의 힘이 아니라, 힘의 균형에서 찾아야 합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힘은 크기가 같은 두 힘일뿐임으로 한 물체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 힘의 균형과 동시적으로 고려되어선 안됩니다. 대신 물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각각의 물체(팀)가 받는 힘만을 따져 봐야 합니다. 줄다리기 줄을 잡아 당기고 있는 한 학생만을 클로즈업해서 생각해봅시다. 반대쪽과 상호작용으로 만들어낸 힘(장력, tension)이 이 학생을 반대편으로 잡아 끌고 있는 동시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로 버티고 있습니다. 즉, 발과 땅바닥이 만들어내는 마찰력(friction force)에 의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버티는 마찰력보다 장력이 크다면, 끌려갈 것이고, 반대로 충분한 마찰력을 만들어 내어 버틸 수 있다면 상대편을 끌고 올 수 있는 것이 줄다리기에 숨은 물리 법칙입니다. 양팀이 비슷한 몸무게를 갖고 있다라는 전제 하에 두 팀이 줄다리기를 한다면, 강한 마찰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신발을 신고 있는 쪽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양팀이 몸무게의 합이 다르다면 마찰력은 물체의 무게와 비례하기 때문에 일단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팀이 어드벤티지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줄다리기의 승패가 줄을 잡아당기는 팔근육보다 버티는 다리 혹은 신발바닥의 마찰력에 더 좌우 된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리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 뒤에 숨어 있는 과학적 이론에 호기심을 갖고 추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큰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경우 위대한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의 엄청난 과학적 업적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로부터였던 것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에도 “왜일까?” 라는 과학적 사고를 함으로 느끼는 재미를 더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램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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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6 PM
      Anyone in the world

      질병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곤 합니다. 뚜렷한 증상이 없어 방심하고 있다가 병이 걸렸다는 것을 안 순간 이미 치료 시기가 너무 늦어버린 안타까운 이야기가 적지 않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주기적인 검진을 권유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게 권유에 따라 정기 건강 검진을 받은 후에 애매한 결과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되고 걱정된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병이 걸린건지, 안 걸린건지 확실하게 대답해 주면 좋으련만, 많은 경우 의사 선생님들께서 말씀해주시는 것은 질병이 걸렸을 확률이 몇 퍼센트정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3 퍼센트, 95 퍼센트 처럼 거의 확실한 경우도 있지만, 30 퍼센트, 45 퍼센트 정도의 확률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걱정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진단검사라는 것은 여러가지 관련 인자들을 두루 조사한 결과에 따라 질병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기준선을 갖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정이 애매한 중간 부분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애매한 부분의 결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질병이 있는데 없다고 오판할 수도 있고, 반대로 질병이 없는데 있다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의학 통계에서 민감도(sensitivity)와 특이도(specificity)로 구분합니다. 민감도는 실제 질병이 있는 사람이 검사를 통해 질병이 있다고 판정(양성반응)을 받는 비율을 뜻하고, 특이도는 질병이 없는 사람이 검사를 통해서 질병이 없다고 판정(음성반응)을 받을 비율을 말합니다. 비슷비슷하게 들리지만, 이 둘은 거의 반대적 의미를 갖습니다. 특이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민감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반대로 민감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특이도를 낮추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진단결과에 대한 경우의 수는 다음의 네가지로 구분됩니다. 질병이 있는데 양성반응을 받는 경우, 질병이 없는데 양성반응을 받는 경우, 질병이 있는 음성반응을 받는 경우, 질병이 없는데 음성반응을 받는 경우입니다. 민감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질병의 징후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모두 환자로 구분하면 됩니다. 기침을 한번이라도 한 사람을 모두 감기환자라고 결론짓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경우, 실제로 감기가 걸린 사람을 환자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공기가 탁해서 기침 한번 한 것 뿐인 사람까지 감기 환자로 분류될 것입니다. 즉, 질병이 안걸렸는 데도 환자로 분류되니, 특이도가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특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기침도 하고, 열도 오르고, 오한으로 고생하며, 콧물도 흘리는 사람만 감기 환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즉, 검사기준을 엄청나게 까다롭게 함으로써 정말 100 퍼센트 감기가 걸렸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만 환자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왠만한 경우라면 모두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되니, 실제 감기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감기에 걸렸다고 판단될 가능성은 매우 적게 됩니다. 하지만, 덕분에 증상이 약한 감기에 걸린 환자들도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것이니 민감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서로 상반되는 민감도와 특이도를 어느 정도 선에서 맞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진단검사의학분야의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염도가 높아서 초기에 질병의 확산을 막아야하는 병일수록 민감도를 높입니다. 일단 의심이 가는 환자들을 격리하고, 추가적인 검사를 통해서 환자가 아닌데도 환자로 구분된 사람들을 다시 필터링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질병의 확산을 원천 봉쇄하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의료계나 보험업계, 또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검사를 진행해야 함으로써, 많은 양의 예산을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검사과정이 까다롭고 힘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냥 민감도만을 높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이 사보험이 발달하고, 의료 보험에 문제가 많은 곳에서는 보험 수가를 높이기 위해서, 조금만 의심되는 환자들도 모두 검사를 받게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민감도를 높임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인 것입니다. 아기가 생겼는지를 초기에 확인하는 임신테스트기들은 대부분 매우 높은 민감도를 갖게 만들어집니다. 임신이 의심되면 병원에 가서 확인을 받게 만듬으로써, 임신을 했음에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를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임신이 되었는 데도 테스터기에서 음성반응을 보였다는 것보다는 테스터기에서는 임신이라고 나왔는데, 병원에 가보니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이도가 높은 경우는 질병이 없는 데도 여러가지 검사를 받기 위해서 고생해야 하는 경우는 적은 대신에, 질병이 있음에도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고 병을 키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비씨주는 공보험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진단에 있어서 특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에 해당합니다. 공공의 세금을 허투루 낭비하는 일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정책적인 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되시는 분들은 의료 부분에 대한 불만이 일반적으로 많이 있으십니다. 한국에선 쉽게 받을 수 있었던 검사 등도, 이곳에서는 확실한 징후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경우도 있고, 한국에서는 이것저것 약도 많이 처방해 주는데, 이곳에서는 약 하나 처방받기도 까다롭다고 불평하시는 분들도 뵌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말씀을 드리기는 힘들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필요없는 약들을 많이 드시는 것이나, 불필요한 검사를 과하게 받으시는 것들이 굳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에서는 건강검진을 할 때, 옵션으로 항목을 넣으면 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 양전자 단층 촬영술)을 이용해서 암 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이용되는 의료 영상 법 중에 인체에 무해하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MRI(자기 영상법)이 유일합니다. 특히, CT 촬영은 일반 흉부 엑스레이보다 10배 이상 강한 엑스레이를 사용하고, PET법은 몸에 소량의 방사성물질을 투여하여 촬영을 합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 허용된 방사선 피폭량에 비교하면 안전한 양이지만, 그렇다고 ‘몸이 좀 찌뿌둥하니까 한번 찍어볼까?’라는 생각으로 옵션을 선택해서 찍을 수 있는 영상법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밴쿠버에서는 다른 조사들에 의해서 거의 확실시 된다라는 소견이 났을 때 사용하는 영상법입니다.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새로운 진단법 개발' 


      위와 같은 광고를 보신다면, 이 말이 질병이 있는 사람만 정확히 질병이 있다고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일반인들이 어느정도의 민감도와 특이도를 갖고 있는 진단법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진단법을 과도하게 맹신하는 일도, 또 애매한 의사 선생님의 진단 때문에 의사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는 실수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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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대 브로이 공작, 루이 빅토르 피에르 레몽 드 브로이(Louis Victor Pierre Raymond de Broglie, 7th duc de Broglie, 1892-1987)


        이름만 듣는다면 중세 시대에 나오는 권력자처럼 생각되지만, 드 브로이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19세기초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마련한 이론 물리학자입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왕자 칭호를 갖고 세습 귀족 지위인 공작(duke)의 칭호를 갖고 있던 것 또한 사실로서 현대 과학자 중 가장 높은 세습 지위를 갖고 있었다는 흥미있는 기록의 소유자입니다. 브로이 가문은 17세기에 프랑스 왕을 섬기기 위해 이태리에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이 14세로부터 세습작위를 하사받았고, 첫 공작의 아들은 프러시아와의 7년전쟁에서의 공적으로 왕자(Prince)의 칭호를 하사받았습니다. 게다가 드 브로이의 친 할아버지는 쿠데타를 통해 수상에 올랐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워낙 명문 정치가의 집안이었기에, 할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은 상대적으로 과학을 대수롭지 않은 학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드 브로이가 아직 물리학 분야에서 그 천재성을 드러내기 전인 1928년에 사망한 그의 어머니는 사랑스런 막내아들이 정치 및 역사 분야를 팽개치고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풍에 따라 정치, 역사학을 공부하던 드 브로이에게 물리학의 흥미로움을 일깨워 준 것 역시 같은 집안의 큰 형, 바로 6대 브로이 공작 모리스였습니다. 


        솔베이 물리학 토론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모리스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당대의 일류 물리학자들과 함께 토론한 내용을 드 브로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토론은 과연 빛은 광자라는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맞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빛의 입자성, 파동성 등의 이야기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드 브로이는 이 날 형 모리스와의 대화가 자신을 물리학의 길로 이끌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설명하며 빛은 입자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했고, 그 입자를 광자(photon)라고 불렀습니다. 이전까지 빛은 파동(wave)의 일종이라고 믿고 있던 과학계는 이후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에 대해서 대립하여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파리 소로본 대학 물리학과 박사과정이었던 드 브로이는 두 주장을 대립시키는 대신 서로 융합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의 논문을 지도교수에게 학위논문으로 제출하였습니다. 오랫동안 파동으로 알고 있던 빛에서 입자의 성질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동안 입자라고 알고 있는 것들에서 파동의 성질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이론적 접근을 통해 모든 물질(입자)들도 그의 고유 파장을 갖고 있으며, 이를 물질파(matter wave)라고 한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었습니다. 이는 만약 드 브로이가 박사과정학생이 아니라 유명 대학 교수 정도의 학자였다면, 너무나 황당하며 배척당할 수도 있었을 만큼 파격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의 지도교수 랑쥬벵(Paul Langevin, 1872-1946)은 그의 이론의 참신함과 열정을 높이 평가해 이를 학위 논문으로 승인했고 1924년 드 브로이는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비록 논문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몇몇의 급진적인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젊은 박사과정학생의 파격적인 논문의 내용에 주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잊혀질 뻔한 천재의 논문은 3년뒤 미국 벨 연구소에서 데이비슨과 거머에 의해 전자 산란 실험(Davisson-Germer experiment)에 의해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실험은 전자를 니켈결정에 쏜 후 그 결과를 측정한 실험인데, 예상과는 달리 X-선을 이용해서 실험한 경우에 보이는 파동의 성질을 동일하게 나타내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전자라는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입자도 파동을 갖고 있다는 드 브로이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보여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드 브로이가 이론적으로 계산했던 파장(wavelength)값이 정확하게 측정되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그의 이론이 완벽하게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나옴으로써, 과학계는 입자 역시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이 발견은 양자역학 발전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 실험이 발표된 후 영국의 과학자 조지 패짓 톰슨(Sir George paget Thomson, 1892-1975)은 다른 실험을 통해서 동일한 전자의 회절현상을 재차 확인하는 데 성공합니다. 입자의 파동성을 예견하고 그것을 증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드 브로이는 1927년에, 데이비슨과 톰슨은 1937년 각각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조지 패짓 톰슨은 전자를 처음으로 발견한 조지프 존 톰슨(J. J. Thomson)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전자의 존재를 밝히고, 아들은 그 전자의 파동 성질을 증명함으로써 부자가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19세기 초에는 과학을 공부하는 것도 가업을 잇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2대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아홉 가족이 부부, 또는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노벨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중 퀴리 부인과 남편, 그 딸과 사위가 모두 노벨상을 받은 퀴리 가족은 현재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남아있습니다. 


        드 브로이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물질들은  물결치는 파도와 비슷한 파동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왜 우리는 이런 파동을 주위의 물질들로부터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순히 파동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차이를 느끼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두 점이 너무 가까이 있다면 이를 두개의 점으로 구별하지 못하고 한점으로 착각합니다. 이를 분해능(resolution)이라고 합니다. 형광등은 1초에 60번이상 쉼없이 깜박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 깜박임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은 초당 60번이상의 깜박임은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광등이 수명이 다하면 그 깜박임의 주기가 길어져서 눈에 보이게 됩니다. 매우 빠르게 깜박이는 바람에 알 수 없었을 뿐, 형광등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과 비슷하게 깜박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질의 파동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의 파동 성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짧은 파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시적(macroscopic) 세계의 물질들의 파동성은 인간이 감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와 같은 미시적(microscopic) 세계의 입자들의 경우, 그들의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파장이 길어지기 때문에 그 성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숲속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시간 날때마다 걷던 익숙한 길인데, 그곳에서 이파리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를 사진기에 담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직접 물어봐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분들의 사진찍는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을 찍고 있다기 보다는 식물 채집을 대신하는 사진을 찍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그 분들을 보고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에겐 그저 산책로 옆 나무들과 풀일 뿐인데, 저 분들에게는 하나하나 신기하고 재미있는 대상이겠구나. 만약, 저 중에 이 산책로에서는 자라기 힘든 풀이라도 있다치면, 그걸 발견하는 저분들은 엄청 신기하고 재미있겠지만, 나에겐 그 흥미로움을 느낄 기회조차 없는거구나. 비록, 저분들보다 더 많이 이 길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딱 아는 만큼 보이는 듯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과학을 탐구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듯 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자람 없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던 드 브로이 공작이 숫자와 공식들로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물리학을 공부한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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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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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섭씨 100도씨에서 끓는다.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과학 상식입니다. 사실, 과학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일상적인 상식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없이 믿고 있는, 그래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이 명제는 정말 조건없는 진실, 즉 당연한 사실일까요?


          산에 올라가서 음식을 해 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물의 끓는점은 압력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물이 섭씨 100도씨에서 끓는 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는 1기압(1 atm) 상태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일반적으로 기압은 낮아지고, 이렇게 낮은 기압에서 물은 100도씨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게 됩니다. 산에 올라가서 밥을 하면 밥이 설익는 것이 바로 이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밥이 맛있게 지어지기 위해서는 물이 끓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100도씨 이상의 온도가 필요한 것인데, 물이 일찍 끓어 버림으로써, 100도씨의 온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압력을 1기압으로 고정한다는 조건이 있다면,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먼저 넣으면, 물의 끓는점이 높아져서 높은 온도에서 빠르게 라면을 익힐 수 있어 더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요리관련 프로에서 많은 연예인들이나 전문 요리사 분들이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이라며 알려주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빠르게 끓인 라면이 과연 맛이 있는가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프를 넣었을 때 높은 온도에서 물이 끓는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를 끓는점 오름현상(boiling point elevation)라고 합니다. 이는 용액 내의 불순물의 양이 증가할수록 용액의 끓는점이 높아지는 현상입니다. 같은 이유로 불순물이 증가하면 물의 어는점은 낮아지며 이를 녹는점 내림(melting point depression, 또는 어는점 내림)현상이라고 합니다. 즉, 라면물의 끓는 온도를 높이기 위해 스프를 먼저 넣는 것과 겨울에 도로위 빙판의 어는점을 낮추기 위해 소금을 뿌리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같은 원리입니다. 정리하자면, 물의 끓는점은 기압 뿐만 아니라 얼마만큼의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는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1기압의 상태에 있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수한 물이라면 과연 그 끓는점은 정확히 100도씨 일까요? 아니, 100도씨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석좌교수이신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이라는 책을 보면, 런던 과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온도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50년 조지 아담스(George Adams, 1709-1772)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온도계에는 화씨(Fahrenheit)를 비롯해 당시에 사용되던 네가지 온도 단위와 함께 몇가지 중요한 온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중 주목할 표기 사항은 특이하게 물의 끓는점이 두군데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온도계에는 화씨 204도(섭씨 95.6도)는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begins to boyle), 화씨 212도(섭씨 100도)는 물이 역동적으로 끓어오르는 온도(water boyles vehemently)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물이 끓는 것이 100도씨라는 하나의 온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250여년 전 조지 아담스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하석 교수는 같은 책에서 대부분의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물의 끓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고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한 과학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지질학자겸 기상학자인 장 앙드레 들룩(Jean-Andre De Luc, 1727-1817)은 물의 끓는 점과 함께 끓어오름이라는 현상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갖었습니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물 속에서 기포가 만들어지는 것인데, 들룩은 물 속에 녹아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공기방울들이 씨앗이 되어 기포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들룩은 물 속에 녹아있는 공기를 제거한 후 물을 끓이는 실험을 생각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물 속의 공기 방울들을 제거 하기 위해 들룩이 사용한 방법은 끊임없이 물이 든 용기를 흔들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그는 약 4주동안 물이 든 용기를 쉼없이 흔들었다고 합니다. 두손을 써야하는 경우와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물을 흔들어 물속 공기방울을 제거하였고, 이 물을 끓여본 결과 실제로 섭씨 112도까지 물이 끓지 않다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확인했다고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물이 몇 도에서 끓어오르는 것인가에 대한 과학적 원리보다 이 칼럼을 통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이삼백년을 지속해 온 연구대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의 끓는점에 대한 오랜 고찰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으로 생각되는 사실이 실제로는 그리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 역시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에 대한 다양성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집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만이 유일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유연함, 또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겸손함은 과학자의 연구 자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물의 끓는점에 대한 연구 자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뭐 그리 쓸데 없는 것을 연구하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유체 역학 등의 분야에서 물의 끓는점과 그 원리는 매우 중요한 근본적 원리이며, 이러한 기초원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많은 관련 분야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순수 수학과 논리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1872-1970)과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가 함께 집필한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복잡한 수학의 논리성 설명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방대한 수학적 원리들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보인 증명 중에 하나는 바로 “1+1=2”라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의 확립으로부터 모든 논리가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중요한 과학적 발견의 시발점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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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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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음'을 나타내는수 ‘0’


            누구나 쉽게 사용하고 있는 숫자 ‘0’.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숫자이기에 그 의미가 무엇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0’이라는 기호와 그 의미가 친숙해진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0’라는 수의 의미는 대부분 ‘없다’라는 의미, 즉 ‘2 빼기 2’와 같이 어떤 수에서 같은 수를 뺐을 때 값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서양 수학의 역사속에서 인류가 ‘0’를 셈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자릿값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백이라는 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일의 자리와 십의 자리에 ‘0’을 두개 위치하고 그 앞에 ‘2’를 두어야 200이라는 수를 나타내어 2, 20 등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리값을 나타내기 위한 ‘0’의 역할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없다’라는 개념의 수를 사용하지도 않고도, 앞서 설명드린 자리값의 표현도 사용하지 않고도 수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요?


            인류가 처음으로 수를 사용했었다는 증거는 1960년 벨기에의 장 드 브라우코르가 콩고의 이샹고(Ishango) 지역에서 발견한 뼈입니다. 원숭이의 뼈로 추정되는 이 뼈는 기원전 2만년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뼈에는 각기 길이가 다른 선 여러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포획한 동물의 수, 또는 날짜를 세기 위한 달력의 표시 등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각기 다른 주장들이 있지만, 그 선들이 무엇인가를 ‘세기’위한 수의 표시였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는 약 2만년전부터 수의 개념을 갖고 살기 시작했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고생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것이 약 600-200만년전,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약 20만년전인 것으로 추정되니 적어도 인간은 사람의 형상을 어느 정도 갖춘 이후로도 약 18만여년동안은 수를 셈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었던 미개한 동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후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셈의 체계를 발달시킵니다. 하지만, 이때의 셈이라는 것은 물물교환의 수단, 세금징수의 용도 등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 즉 음수와 같은 개념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빚을 지는 것을 마이너스, 즉 음수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빚을 얼마나 지었는가라는 표현만 필요할 뿐, 빚의 양은 양수로 충분히 표현이 되기 때문에 음수의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앞서 설명드린대로 자릿수를 나타내기 위한 필요성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대의 그리스나 로마 등의 숫자들은 십의 자리, 백의 자리 등을 표현하는 수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는 일의 자리, #는 십의 자리, 그리고 &는 백의 자리를 나타내는 수라면 432라는 수는 &&&###@@라고 표기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로마숫자 I, II, III, VI 등이 표현되었고, X가 십을 뜻하는 숫자로 23의 경우 XXIII으로 표현을 하면 되니 지금과 같은 자릿수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0’이라는 표현의 필요성을 가져온 것은 현재 우리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에서 비롯됩니다. 아라비아 숫자는 고대 인도에서 창안된 수체계입니다. 이것이 인도숫자가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리는 것은, 이후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에 숫자가 전파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 이슬람 지역에서는 인도를 의미한 힌두숫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 숫자는 1-9로 이루어진 아홉개의 숫자를 갖고 있었습니다. ‘없다’라는 수학적 개념은 있었지만, 초기에는 이를 표기하는 기호는 존재하지 않았고 산스크리트어로 ‘순야(Sunya)’라는 말로 ‘형상이 없음’, ‘빈 상태’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초기의 인도숫자는 자리값을 나타내는 수가 없었기 때문에 띄어쓰기로 자리를 표현했습니다. 즉, 2002라는 숫자는 ‘2  2’와 같이 두자리를 띄어쓰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띄어쓰기 간격이 일정치 않아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후, 4세기경 아리아바타(476-550)라는 인도 수학자의 저서에서 띄어쓰기대신에 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보였으며, 약 6세기정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인도 차투르부즈(Chaturbhuj) 사원의 비문에는 선명하게 ‘0’을 사용한 270이라는 수가 적혀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0’이 사용된 기록물로 남아있습니다. 이후 9세기경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 콰리즈미라는 페르시아인에 의해 유럽으로 처음 인도의 수, 즉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이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10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가 전파되었을 때에도 유럽인들은 ‘없다’라는 개념의 ‘0’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유럽에 ‘0’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무려 수백년이 지난 1202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 1170-1250)라는 이탈리아 수학자가 아라비아 숫자와 그를 이용한 수학 교본인 산술교본(Liber Abaci)라는 책을 출판한 이후였습니다. 피보나치는 자신의 책에서 아라비아의 수 체계에 대해 ‘인도인들은 1,2,3,4,5,6,7,8,9라는 아홉개의 숫자와 ‘0’이라는 기호를 이용하여 가능한 모든 수를 표현할 수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피보나치 역시 ‘0’은 다른 숫자와는 다른 ‘기호’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왜 이다지도 ‘0’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요? 사실 수학은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폭발적인 발전을 해왔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추상적인 것을 생각하기 전의 수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셈하는 역할만을 담당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세는 것이 전부였으니 보이지 않는 ‘음수’를 정의할 수도 없었으며, 그 사이의 ‘없음’을 의미하는 수, 즉 ‘0’을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음수는 인도수학에서도 7세기경 브라마굽타라는 수학자에 의해 언급되었으며, 이것이 ‘0’의 사용이 시작된 얼마 후인것은 분명 그 연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수가 서양의 수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00년대가 지나서야나 이루어졌으니 음수라는 개념이 현대와 같이 사용된 것은 불과 400여년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 수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좌표체계를 처음 만들어낸 데카르트(Rene Descarte, 1596-1650)조차도 음의 수는 잘못된 수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서양의 수학체계는 음수의 영역을 오랫동안 배척해 왔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와 대조적으로 동양의 수학은 음수의 개념을 매우 오래전부터 알고 사용해 왔습니다. 263년 중국 위나라의 유휘가 엮은 ‘구장산술’이라는 책에서 벌써 음수의 개념이 나오고 있습니다. 원래 이책은 1세기 무렵에 쓰여졌다고 전해지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여러 계산법을 설명하고 있는 수학책인데, 놀랍게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계산방법은 현대 수학의 행렬(matrix) 계산법과 동일하며 음수와 양수가 섞은 계산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동양수학에서 ‘0’의 개념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900년대 후반입니다. 그 시대가 인도에서 ‘0’을 사용하기 시작한 얼마 후이기 때문에 동양의 ‘0’의 개념도 인도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이미 그 이전부터 음수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자체적으로 ‘0’의 개념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구인류는 무시하고 현생인류가 생겨난 이후만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수개념을 제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현생인류가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하루, 즉 24시간으로 비유하자면 인류가 수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약 20분정도에 해당합니다. 그 짧은 20분만에 동물뼈 위에 잡아온 물고기의 수를 표시하던 인간들은 우주 밖으로 탐사선을 쏘아 올리고, 원자보다 작은 단위의 입자들의 크기와 질량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매스컴에서 터져 나오는 과학발전의 속도가 무섭습니다. 몇달 전까지만해도 신기술이라 칭송 받던 것들이 구기술 취급을 받는 것이 별 일이 아닌 세상입니다. 지난 “20분”에 이룩한 발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빨라졌고 또 더 빨리질 현대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로 앞으로 “20분후”의 인류는 과연 어디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해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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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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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의 발달이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스스로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 우리는 전화기 속의 인공지능에게 오늘의 날씨가 어떤지, 그래서 우비를 입는 것이 좋을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수를 익혀서 인간을 상대로 바둑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이미 2년전의 흘러간 이야기입니다. 인공지능의 활용은 우리가 ‘머리를 써서’ 일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거나 용트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활용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 이면에는 앞으로는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실직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다국적 회계컨설팅기업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서 발표한 보고서는 2030년 중반까지 인공지능의 발달이 전세계의 직업과 자동화 트랜드에 의한 변화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30여개국의 다양한 직업군에 속해 있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된 것이라고 PwC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른 현재 약 37%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지게 될 직업군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고 74%의 사람들은 그런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기술이나 정보를 배우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으며, 미래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사람들만이 안정된 직장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73%의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성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인공지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앞으로 2030년대까지 전세계 경제의 변화트랜드를 분석, 예측하고 있는데, 그중 직업군의 변화에 인공지능의 발달이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우선 앞으로 5-10년동안 인공지능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은 ‘금융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는 직업은 저학력자들이 종사하는 단순 노동에 관련된 직업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은 정확한 분석력을 요구하는 금융관련 종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초기의 변화일 뿐이고, 장기적으로 2030년대가 되면 저교육자들이 종사하는 직업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공장은 전체 라인을 감독하는 한두명의 사람들만으로 운영되는 것이 충분하며, 단순한 작업들은 모두 로봇들에 의해 대체 될 것입니다. 식료품점, 잡화점 등의 캐쉬어들도 가장 빨리 사라지게 될 직업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아마존이라는 기업에 의해 시애틀을 포함해서 북미의 몇몇의 도시에서 시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판매점의 경우, 물건을 고른 후 계산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게이트를 통해 지나가기만 하면 카트에 실려있는 물건들의 바코드를 컴퓨터가 전체적으로 읽어들여서 자동으로 이미 등록된 계좌에서 인출해 나가는 시스템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랜드를 이어서, 약 10여년 뒤부터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직업군은 운송 및 물류관련 산업이라고 보고서는 예측했습니다. 시험단계에 들어가는 자율주행차량들이 도입되면 우선 대중교통인 버스, 택시에 운전사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앞서 설명드린 물건을 구입하는 시스템은 대량의 물류창고에서도 도입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에 유통, 물류분야에서 속한 많은 단순 노동관련직들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또하나의 분야는 언어, 또는 언어교육관련 업종입니다. 이미 여행을 다니는 TV 프로그램들을 보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스마트폰의 번역 어플을 사용해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길을 찾아다니기도 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직은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이상하게 번역된 내용때문에 난처한 상황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웃고 즐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에러는 줄어들 것이고 동시에 여러 언어를 번역해 낼 수 있는 기술도 곧 대중화될 것입니다. 이런 통역, 번역기를 무선 이어폰처럼 귀에 꽂고 대화를 하면, 내가 한국말로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동시에 영어, 독일어, 일어등으로 번역되어 들리게 되는 기술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개발되어 있는 기술이며 머지 않은 미래에 상용화 또 대중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기술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모국어외에 다른 나라의 언어는 배워야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교육 관련 분야 업종에 큰 변화가 올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교육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일각에 존재합니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언어 공부는 줄어들겠지만 언어를 창조적인 일들에 도구로 활용하는 사람들, 즉 작가나 시인들과 같은 분들은 지속적으로 언어를 탐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 교육을 이어갈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많은 이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성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를 가능케 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기에, 가능하다하더라도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고서는 역시 인공지능의 발달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대체되지 않을 직업들은 창조성, 혁신성, 인간의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이라고 구분했습니다. 소통언어를 가르치는 업종보다는 언어를 매개로 창조성을 발휘하는 작가나 시인, 물리적으로 어려운 수술을 잘 해내는 의사보다는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 분석가나 상담사 등이 이런 업종에 속합니다.


              앞으로 어떤 직업군이 유망할 것인가를 예측해보는 것은 그 시대에 사회의 주축이 될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더 민감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래도 안정적인’ 직업을 택할 것을 권합니다. 이미 그 시기를 보내보신 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이 가려고자 하는 길 앞에 다가올 어렵고, 힘든 미래가 보이시니 그보다는 안정적이고 편한 길을 선택하길 바라시는 지극히 당연한 바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길이 옳고 그르다라는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군이 과연 10여년이후에도 안정적일지는 요즘같은 급박한 변화하는 사회를 볼 때 예단하게 어렵습니다. 보고서가 말해주듯이 많은 저학력자들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동안 ‘안정적인 직업’ 이라고 각광 받았던 고학력자들의 직업군도 상당부분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하는 ‘교육’의 페러다임을 ‘안정’이라는 선에서 찾기보다는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흥미를 가지고 어떻게 더 창의성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발전시킬지에 두고 계획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가늠키 어려운 미래의 세상에 더 잘 적응하고 그 속에서 유능함을 인정 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성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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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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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코끼리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라는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 한마리에 대해 손으로 더듬어 가며 힘들게 알아가고 있지만, 지금까지 만져본 부분이 그저 코끼리의 왼쪽 발가락뿐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만지고 있는 코끼리 외에 어떤 또 다른 동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코끼리 중 ‘중력(gravitation)’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는 정말 골치아픈 녀석중 하나입니다.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누구나 배우는 내용이기에 많은 이들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물리적 특성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하며, 더구나 왜 중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인된 바없는 이론들 뿐입니다. 물리를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물리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 일수록 중력에 대해 아는 게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중력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천재 과학자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과 함께 시작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뉴턴이 세상에 중력에 관한 법칙을 들어내는 데에는 의외의 인물이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75년의 공전주기로 태양계를 가로질러 돌아다니는 핼리혜성으로 유명한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가 그 주인공입니다. 사실, 핼리는 핼리혜성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닙니다. 핼리는 혜성의 공전성을 처음으로 예측하고 다음 핼리혜성이 다시 태양 근처로 오게되는 시점을 정확하게 예측한 과학자입니다. 후대 과학자들이 그의 업적을 높이 여겨 그의 이름을 혜성에 붙여줌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딴 혜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혜성의 공전성에 대해 연구하던 핼리는 어느날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도움을 얻기 위해 당시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있던 뉴턴을 찾아갑니다. 기록에 의하면 공식적인 방문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리는 정도의 만남이었다고 합니다. 핼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뉴튼에게 혜성이 만약 태양의 어떤 힘에 의해 태양계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이라면 그 궤도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를 물었고, 뉴튼은 무심한듯 그건 타원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오랫동안 고민해도 답을 얻지 못한 부분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답을 해주는 뉴턴에게 어찌 그렇게 쉽게 답을 할 수 있는지 묻자, 뉴턴은 ‘이미 계산을 해본 것이니까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핼리는 이렇게 중요한 발견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뉴턴을 설득했고, 이에 뉴턴은 중력에 관한 연구를 정리하여 1687년부터 1726년까지 세권의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책을 출간하게 됩니다. 핼리가 뉴턴에게 혜성 궤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중력에 대한 비밀은 더 오래 베일에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뉴턴의 중력법칙이 세상에 알려지자 온 세상의 과학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달이 지구주변을 도는 이유, 혜성이 주기를 갖고 태양계를 돌아다니는 이유,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모든 이유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한 식이 발표되었으니 사람들은 뉴턴을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으로 추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뉴턴 덕분에 우리는 이 우주의 기본법칙들에 대해 완벽하게 알아냈다고 떠들었습니다. 드디어 ‘중력'이라는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이후 약 200여년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1900년대 초 아인슈타인이라는 또 다른 한명의 신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은 자가 나타날 때까지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대한 주인공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 무거운 질량을 갖는 물체들은 서로 잡아당기며, 우리가 지구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구가 우리를 지구 중심으로 잡아당기는 힘, 즉 중력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중력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무거운 질량을 갖는 지구가 아니라 그 주변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자주 탄력이 좋은 양탄자 위에 놓인 볼링공을 이용합니다. 고무와 같이 탄력이 매우 좋은 양탄자가 있고, 그 네 귀퉁이를 네 사람이 잡아당겨 공중에 양탄자를 펼쳐놓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위에 가볍고 작은 목각인형을 살며시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양탄자 정 가운데에 무거운 볼링공을 살며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무거운 볼링공은 탄력좋은 양탄자를 늘어뜨리며 아래로 축 처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처음에 놓아둔 목각인형은 어떻게 될까요? 양탄자가 늘어짐에 따라 볼링공쪽으로 굴러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목각인형을 볼링공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 것은 볼링공이 아니라 볼링공의 무게때문에 늘어져버린 양탄자라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 주변의 공간(space)을 탄력 좋은 양탄자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공간에 무거운 지구가 위치하면 주변의 공간이 양탄자와 같이 늘어남의 효과를 갖게 되고, 그 주변의 물질들이 지구쪽으로 쏠리게 되며, 이것이 우리가 지구가 잡아당기는 것으로 느끼는 중력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양탄자는 2차원의 평면이지만 공간은 3차원의 입체이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조금 표현을 바꿔보자면, 우리가 지구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지구가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공간이 우리를 지구에 꾸욱 누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공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우리를 지구쪽으로 누르고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지만, 현대의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설명이 중력의 실체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력이라는 ‘코끼리'의 실체를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뉴튼의 중력에 대한 설명은 코끼리의 발톱,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왼쪽 다리 허벅지정도에 해당하는 정도일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현대 과학에서 중력에 의한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는 중력자(graviton)이라는 입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중력에 대한 이해가 맞다는 확실한 도장을 받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은 지금도 중력자 검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만약 끝까지 검출이 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중력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아직도 중력이라는 ‘코끼리’에는 더듬어 봐야 할 곳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험을 통하고,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수정될 수도, 어쩌면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는 것이 과학적 진리들입니다. 역사속에서 수많은 과학적 진리들이 폐기되기도 하고, 고쳐지면서 지금의 과학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우주의 진리에 가까이 왔다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도 뉴턴 시대의 과학자들이 뉴턴의 중력 법칙에 열광했던 것과 같은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과학자들은 내가 밝혀낸 진실이 코끼리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수도 있다고 경계하며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조금 더 새로운 부분을 더듬어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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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Joon Sam - Tuesday, 11 February 2020, 2:21 PM
                  Anyone in the world

                  17세기 중반 프랑스의 귀족출신 도박사 드 메레(Antoine Gombaud, Chevalier de Mere, 1607-1684)는 주사위를 이용한 단순한 도박을 즐겨했습니다. 그는 주사위 하나를 네번 던져서 6이 적어도 한번 나오는 것과 주사위 두개를 스물 네번 던져서 동시에 두 주사위가 6이 되는 것이 한번이라도 나오는 것 중 어디에 돈을 걸 것인가라는 내기를 제안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걸게 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스믈 네번, 즉 네번보다 무려 여섯배나 많은 찬스가 주어지는 두번째의 경우가 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두번째에 돈을 걸었고, 경험적으로 첫번째의 경우가 더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드 메레는 쉽게 돈을 벌곤 했습니다. 단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왜 첫번째의 경우가 더 확률이 높은 것인지 궁금했던 드 메레는 친한 친구이자 유명한 수학자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게 이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드 메레에게 설명해 주면서 흥미를 느낀 파스칼은 도박에 얽혀있는 더 많은 수학적 원리들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이를 당시 판사이자 수학자이었던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7-1665)와 함께 고민해보기 시작하면서 현대의 확률론이 학문적으로 발달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드 메레의 도박 원리를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주사위에는 여섯 개의 숫자가 있고, 정상적인 주사위라면 여섯면이 나올 확률은 모두 같기 때문에 주사위를 한번 던져서 6이라는 숫자가 나올 확률은 육분의 일(⅙)이 됩니다. 반대로 6이 나오지 않을 확률은 6이 나올 확률을 전체에서 빼면 되니, 1-(⅙) 즉 육분의 오(⅚)가 됩니다. 주사위를 네번 던졌는데, 네번 모두 6이 나오지 않을 확률은 (⅚)x(⅚)x(⅚)x(⅚)이 되며, 이를 전체(1)에서 빼면 네번의 기회중 적어도 한번 6이 나올 확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계산해 보면 0.5177, 즉 51.77%의 이길 확률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작 1.77%밖에 안되지만, 반반의 확률 50%를 넘으니 도박을 반복하면 할 수록, 돈을 딸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의 경우는 두 주사위를 동시에 던지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6x6, 즉 서른 여섯가지나 되고, 그중에 단 한경우만이 6과 6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이므로, 위와 비슷하게 계산해 보면 전체에서 (35/36)를 스물 네번 곱한 수를 뺀 값 1- (35/36)x(35/36)x….(35/36)=0.4914를 얻게 되며, 이는 돈을 딸 수 있는 확률이 49.14%라는 뜻입니다. 이는 50%보다 낮은 확률로서 내기를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돈을 잃을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51.77%, 49.14%는 둘 다 반반의 확률 50%에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에 의해서 도박의 성공여부가 결정된 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이 작은 차이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수학과 오구리 교수(Hirosi Ooguri)는 자신의 책,”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 도박의 확률을 인생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확률 공식들을 이용해 도박을 통해서 기본자금으로부터 목표 금액을 달성할 수 있는 확률을 보여줍니다. 본 칼럼은 크게 수학적인 지식이 없는 분들도 부담없이 읽으실 수 있게 쓰는 것이 목적이니 실제 공식을 이곳에서 설명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실제 공식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구리 교수의 책이나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의 공식을 이용하면, 이길 확률이 p, 질 확률이 q(=1-p)인 한번에 1 달러씩 걸 수 있는 도박을 통해 초기자금에서 시작해 목표 금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상할 수 있듯이,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정확하게 50%씩이라면 처음에 시작한 돈을 두배로 불릴 수 있는 확률과, 처음 돈을 완전히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될 확률은 정확히 같습니다. 하지만,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아주 조금만 차이가 나더라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직접 오구리 교수의 공식을 이용해서 계산해본 결과 이길 확률이 49.5%으로 0.5%만 낮아지고 질 확률이 50.5%로 0.5%만 높아져도 10달러의 돈을 갖고 시작해서 20달러를 만들어 낼 확률은 45%로 떨어집니다.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초기 자금이 50달러로 높아져서 그 두배인 100달러를 만들어낼 확률은 26.9%로, 100달러로 시작해서 200달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은 고작 11.9%로 낮아져 버립니다. 그리고, 실제 카지노와 같은 도박업소들은 바로 이 작은 확률의 차이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돈을 벌어들입니다. 슬롯머신이나 룰렛과 같은 게임들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 이길 확률이 49%나 된다고 어느 카지노 매장에서 광고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49%면 50%에 매우 가까우니 이정도면 해볼만하다, 또는 그것도 사업이니 손님이 이길 확률이 50%를 넘게 해준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나, 상식적으로 49%정도면 엄청 해볼만 한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위에 공식으로 계산해 봤을 때, 이 확률에서 100불을 가지고 도박을 시작해서 200불이 될 확률은 1.79%로 말도 안되게 떨어져 버립니다. 49%나 되는(?) 승률에서 돈을 못따는건 단지 운이 없어서니 더 많은 돈으로 더 오랜 시간 투자하면 언젠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만, 수학의 결과는 그럴수록 더 많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박과 확률에 대한 수학적 이야기는 이정도에서 역시 도박은 할 수록 돈을 잃게 되니 안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며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오구리 교수는 여기서 획기적인 반전을 이야기하며 매우 흥미로운 또 하나의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만약,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반반에서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다면?’이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공식을 이용해서 다시 계산을 해봤습니다. 이번에는 이길 확률을 0.5%올려 50.5%를 만들고 질 확률을 49.5%로 낮춰 보았습니다. 그 조그만 변화만으로 100불을 200불로 만들 수 있는 확률은 88%로 치솟고, 이길 확률 51%의 경우에는 확률이 무려 98.2%, 즉 왠만해서는 돈을 두배로 불리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반전을 도박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길 확률을 갖고 있는 도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오구리 교수는 이 이론을 우리의 인생에 적용해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아니면 적어도 지금하고 있는 어떤 일에서 성공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는 도박에서 돈을 딸 것인가 아니면 잃을 것인가와 같은 이분법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여부는 아주 작은 여러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가 각각의 작은 스텝들을 잘 이루어낼 수 있는 확률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높여 준다면 이것이 바로 한판의 도박에서 작은 돈을 딸 수 있는 확률을 조금 올려주는 것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변화가 전체 업무, 나아가 전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확률을 98%를 육박하게 끌어올릴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새 학기가 시작했습니다. 12학년에 올라가는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각오를 다짐합니다. 무료하고 무언가 부족했던 그 동안의 생활을 반성하고 목표를 이루고자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학생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꿈꾸고 목표를 세우면 무언가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쉽게 만들지 못하면 핑계거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저런 것들은 내 지금의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들이니, 애초부터 그것을 이루는 건 불가능이었을꺼야’라는 식으로 목표를 향해 다가가지 못한 자신을 위로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언가 거대하고, 대단한 변화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아주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오구리 교수는 단순한 확률 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고가의 장비, 숙련된 기술, 엄청난 투자 등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한시간정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을 읽거나 산책하기, 허둥거리며 하루를 시작하지 않기위해 30분정도 일찍 일어나기, 3-4층정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다녀보기 등 아주 작은, 하지만 우리에게 적어도 0.5%의 성공확률을 올려줄 수 있는 그리 어렵지 않은 변화들이 그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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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재미있는 동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리얼버라이어티쇼의 한부분이었는데 출연자들이 여행을 다니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출연자중 한사람이 산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올라간다고 말하자, 다른 출연자들이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대꾸하는 장면이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더워지는 이유가 태양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라고 그 출연자가 설명하자 다른 출연자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명에 박장대소를 하면서도 몇몇의 표정은 ‘어, 진짜 그런가?’라는 듯 했고, 다른 대부분 출연자들의 표정은 ‘어, 그러게? 태양에 더 가까워지는데 왜 산에 올라갈수록 추워지지?’라고 스스로 의문을 갖는 듯 해 보였습니다.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보던 시청자들 중에도 ‘산 위가 춥다는 건 알지만 왜 그럴까?’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록 추워진다는 것은 상식적인 내용입니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하는 산악대원들이 반팔 반바지 대신, 두꺼운 방한자켓을 입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출연자가 주장했듯이 태양에 더 가까워지는데 왜 높이 올라갈 수록 더 추워지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표면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에게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는 그곳이 얼마나 따뜻한가와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지구보다 태양에 가깝게 있는 수성이나 금성이 지구와 비교해 더 뜨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구 지표면에서 태양쪽으로 더 높이 올라가거나 반대방향으로 멀리가는 것에 의한 효과는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약 1억 4960만 km로,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데 약 8분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거리입니다. 이에 비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의 고도는 고작 8.8 km일 뿐이니,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태양까지의 거리는 원래 거리의 0.000059 퍼센트밖에 가까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즉,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그 거리의 변화가 너무나도 적어서 온도변화에 영향을 줄 큰 요인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통 아주 작은 것을 비유할 때 눈꼽만큼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태양을 난로, 지구를 그 옆에서 불을 쬐고 있는 누군가로 상상해 볼때,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정도의 높이 변화는 눈꼽만큼의 변화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작고도 작은 변화일 뿐입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어쨋든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니 영향이 있지 않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태양과의 거리변화는 온도변화의 주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돌고 있는 지구에서 (북반구 기준) 가장 더운 여름이 될 때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질 때이고, 겨울에 해당할 때가 태양에 가장 가깝게 위치할 때입니다. 결국 여름이냐 겨울이냐가 결정되는 것 자체가 태양과의 거리가 아니라 얼마나 오랜 시간 태양에 노출되는가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어서 태양을 향하는 낮시간과 태양의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밤시간의 길이의 차이에 의해 계절이 결정되고, 북반구에 위치한 곳이 가장 긴 낮시간을 갖는 여름의 시기에 지구는 사실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태양과의 거리는 해당 위치의 기온과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록 기온은 떨어지는 것일까요? 이것은 기온을 결정하는 것이 태양이 아니라 지구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열에너지가 지구로 전달되는 것은 당연히 맞습니다. 하지만, 대기권에 있는 공기 입자들이 직접적으로 태양광에너지를 흡수하는 정도는 매우 적으며, 대부분의 태양광에너지는 지표면의 육지, 바다에 흡수됩니다. 이렇게 열에너지를 흡수한 지구는 이 에너지를 대기권으로 재방출하는데, 이를 지구복사열 (thermal radiation of the earth)이라고 합니다. 방출되는 에너지는 지표면 바로 위에 있는 공기층을 직접적으로 데우는 역할을 합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로 덥혀진 지표 근처 공기층이 위로 상승하고 위쪽의 차가운 공기가 다시 지표면으로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대기권전체에 열에너지를 전달하게 되는데, 이를 대류현상(convection)이라고 합니다. 마치 라면 물을 끓일때, 렌지에 닿아있는 냄비의 아랫부분의 물이 데워져 위로 올라가고 위쪽의 상대적으로 덜 덥혀진 물들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순환하여 전체 물을 고르게 덥히는 현상과 같습니다. 아래쪽에서 덥혀진 공기층이 위로 올라가는데, 덥혀진 공기들이 계속 위로 올라간다면 상층부의 공기가 더 따뜻해야 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공기의 압력차이에 있습니다. 지구의 대기권은 지구 중력에 의해 붙잡혀 있는 공기입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지구 중력이 약한 상층부로 올라갈 수록 공기의 입자가 희박해지고 압력이 낮아집니다. 지표면 근처에서 더워진 공기가 위로 상승하게 되면 압력이 낮은 부분으로 이동하게 되고, 주변의 낮은 압력 덕분에 공기층은 팽창을 합니다. 공기가 팽창한다는 것은 내부의 입자들이 주변 공기층을 밀어내며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려 하는 것으로, 바깥부분에 일(work)을 하며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에너지를 잃는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온도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록 기온이 낮아지는 이유입니다. 온도가 낮아진 공기층은 상대적으로 더운 아래쪽 공기가 올라올때 다시 밀려 아래로 내려가기를 반복하게 되며 앞서 말씀드린 대류현상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바람을 일으키는 원리가 됩니다. 


                    산으로 올라가면 더 더워질 것이라는 출연자의 말에 다른 출연자들, 그것을 보는 모든 많은 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태양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라는 그의 논리에 쉽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출연자는 없었습니다. 틀린 이유에 의해 황당한 결론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록 온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갖고 있던 그 출연자가 어찌보면 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는 사실만은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니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한 다른 출연자들 보다는 낫다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에 의거해 추론을 할 경우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주장하게 되는지 역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에 우리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홍수속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거짓 정보와 잘못된 기사들이 우리 주변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이런 혼돈속에서 정확한 사실에 의거한 정보만을 믿고, 거짓 정보들을 걸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내야 합니다. 기본적인 지식을 충분히 쌓고, 누군가의 말을, 비록 전문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항상 논리적으로 되짚어보는 습관을 갖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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