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튼과 만류 인력의 이야기를 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과 나무. 바로 그 뉴튼과 함께 했던 사과나무의 직계 후손에 해당하는 나무가 밴쿠버 UBC 캠퍼스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UBC의 남쪽 캠퍼스 끝에 위치한 TRIUMF(TRI University Meson Facility)라는 캐나다 국립 입자 물리 연구소 앞 로터리에 일곱 그루의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들이 바로 뉴튼의 사과나무의 가지들을 옮겨와 자란 나무들입니다.
아이작 뉴튼 (Sir Isaac Newton, 1642-1726). ‘질량을 갖는 모든 물체들은 서로 잡아당기는 힘을 갖는다’라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모든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성질, 그리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이유, 지구가 태양을 도는 이유 등,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동일한 물리법칙, 즉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알아낸 과학자로 사실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입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뉴튼의 전기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아래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666년 어느 늦은 여름날이었습니다. 영국 링컨셔의 고향 마을에서 사과나무 밑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뉴튼이 한참 책에 빠져 있을 때 사과가 나무에서 ‘툭’ 하고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뉴튼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졌을까?’”
위에 이야기는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 교양서 중 하나에 나온 아이작 뉴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각색을 조금 다르게 했을 수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뉴튼의 사과나무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의 어린이 위인전에 나오는 뉴튼에 관한 유명한 일화입니다. 심지어 필자가 어렸을 때 본 어떤 책에서는 뉴튼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가 떨어진 사과에 머리를 부딫히고 잠이 깨어 일어나 만유인력에 대한 최초의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실제 그 어떤 뉴튼의 공식적인 만유인력에 관련된 논문이나 발표 중에 사과나무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실제 그의 논문을 보면 대포알을 쏘았을 때 대포알이 다시 지구로 떨어진다던지, 충분하게 빠른 속도로 발사한다면 그 물체가 달과 같이 지구를 궤도운동할 수도 있다는 식의 설명은 있지만, 사과에 빗대어 설명한 부분은 적어도 남아있는 기록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뉴튼이 남긴 어떤 글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야기가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일화가 되어 있는 것일까요?
과연 사과나무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실이기는 한 것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영국 왕립 학회(The Royal Society in London)이 2010년에 대중에게 공개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뉴튼의 말년에 그와의 잦은 만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윌리엄 스터클리(William Stukeley, 1687-1765)가 쓴 ‘아이작 뉴튼경의 삶에 대한 회고록(Memoirs of Sir Isaac Newton’s Life)’라는 글입니다.
스터클리는 뉴튼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뉴튼의 유년시절부터 말년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1752년에 영국 왕립학회에 보냈고, 학회가 보관해온 이 오래된 문서를 2010년에 대중에게 공개된 것입니다.
스터클리는 뉴튼과 같이 링컨셔 출신의 과학자로서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뉴튼의 말년에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서의 42페이지에 보면 1726년 어느날 뉴튼과 스터클리가 함께 뉴튼의 고향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녁식사후 따뜻한 햇살 아래, 우리는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사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차한잔을 함께 했다. 뉴튼과 나, 이렇게 단 둘이서만. 다른 여러가지 이야기들 중에,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가 처음 중력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도 지금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과 거의 상황이었다고 했다.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그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서 사과는 왜 항상 바닥을 향해서 떨어지기만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바로 이 대목이 실제로 뉴튼과 사과나무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하다고 볼 수 있는 기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역시 뉴튼이 실제 만유인력을 발표한지 50여년이 지난 이 후에 사적인 자리에서 차 한 잔을 하며 한 이야기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이야기에 크게 신빙성을 둘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뉴튼이 이 회고록의 대목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사과나무에 대해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그 근거로 이야기합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졌던 사과 한 개가 뉴튼에게 만유인력에 대한 최초의 영감을 준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과나무와 뉴튼의 일화는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목욕 중 밀도와 부피와의 관계를 알아내고 “유레카”를 외쳤다는 것과 더불어 사소한 것으로부터 물리법칙을 깨닫게 된 과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작 뉴튼의 고향집에 있는 사과나무는 위대한 물리법칙의 발견의 상징물이 되어 그의 가지들이 전세계의 연구소 등지에 퍼져나가 심어져 있기도 하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UBC 캠퍼스 내에 있는 사과나무들입니다.
약 350년 전 한 과학자의 위대한 발견과 함께 했던 나무의 후손들이 현재 바로 우리들의 옆에서 묵묵히 자라고 있으며, 그 나무들의 주변에서 더 커다란 발견을 하기 위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묵묵히 그들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졸린 눈을 겨우 비비고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아이들 아침식사와 도시락 준비에 정신이 없는 아내를 조금이나마 돕고, 부랴부랴 아이들을 학교에 라이드해주는 전쟁터같은 아침 의식을 치르고 난 후, 아내와 함께 숨 돌리고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면, 그제서야 머리 속 뇌가 슬슬 깨어나 제대로 된 작동을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의 향과 기운이 온 몸에 퍼지면서 뇌를 포함한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기지개를 피고 작동을 시작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면, 그 느낌이 너무 좋아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너무 심하게 카페인 중독이 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카페인(Caffeine)은 자연에 존재하는 염기물질 중 질소(Nitrogen) 원자를 포함하고 있는 화합물, 즉 알칼로이드(Alkaloid)의 한 종류입니다. 대부분 식물의 성분으로 존재하는 알칼로이드는 신경계의 자극을 강화시키거나 억제시키는 반응을 하는 물질로 마취제로 사용되는 모르핀, 커피에 들어있는 카페인, 담배의 주성분인 니코틴, 그리고 마약 성분의 코카인 등이 모두 알칼로이드에 속하는 화학물질들입니다. 이중 대부분이 인체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안좋은 영향을 주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전문의의 결정에 따라서만 사용하거나 또는 복용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커피나 차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적은 양을 섭취했을 경우는 순기능이 더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적당량의 카페인을 섭취하였을 경우, 중추신경계의 자극을 더 강하게 만들어 학업이나 작업 등의 집중도를 높여주는 작용을 하기도 하고, 이뇨작용을 촉진하여 체내의 노폐물을 빠르게 배출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경작용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위액분비를 증가시켜 소화를 돕기도 하고, 심장근육의 이완 수축을 돕기 때문에 강심제로 사용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 편두통을 해소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알칼로이드가 몸에 해롭듯이 카페인도 많이 복용하는 경우 역효과를 낼 수 있는데, 과다 복용을 할 경우, 촉진의 기능이 정상을 넘어서, 신경과민, 떨림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섭취할 경우 내성이 생겨서 카페인 중독증을 일으킬 위험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때문에 너무 많은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을 우려하는 경우, 커피 대신 녹차를 마시는 것을 권하기도 합니다. 녹찻잎 자체에 카페인의 양은 커피의 그것과 비교해서 결코 적지 않은 양이지만, 녹자를 우려내는 온도가 일반적으로 커피를 내리는 물의 온도보다 낮고, 카페인은 낮은 온도의 물에서 더 적은 양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녹차에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카페인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최근 커피 매니아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더치커피가 일반적인 커피보다 카페인의 양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더치커피는 뜨거운 물을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찬물을 오랜 시간동안 커피에 노출시켜 우려내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카페인이 적게 포함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생각에 음주 후에 커피 한 잔으로 술을 깨고 운전을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커피를 마시면, 앞서 설명을 드린대로 중추신경계의 자극이 강해짐에 따라 정신이 또렷해지는 듯하지만, 이것은 혈중 알콜농도를 낮춰 실제로 술이 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운전 등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신경계의 자극을 증폭시킴으로써 집중도를 높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피로도가 더 높아지고 음주운전 등을 할 경우, 실수를 할 확률이 높아질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심리적으로도 전혀 술이 깬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고 착각할 수 있어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물론, 카페인이 이렇게 커피나 녹차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즐겨먹는 초콜렛,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등에도 카페인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러한 음식들을 섭취할 경우, 아이들이 너무 많은 양의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지 않도록 부모님께서 주의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과유불급.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듯 카페인도 너무 많은 양을 섭취하지 않도록 조절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비단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인 우리들도 살면서 ‘알맞은’ 양을 조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일을 시작하거나 수업을 시작할 때 무엇보다 먼저 챙기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커피 한 잔이니 말입니다.
(지난 2019년 2월21일자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수많은 기사와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세상입니다.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정보에 묻혀 버린 듯 한 느낌을 받을 정도 입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봇물 터지듯이 나오다보니,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잘못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로 인해, 걸러지지 않은 추측성 기사, 완전히 잘못된 가짜 뉴스들이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퍼져나가 사회적 문제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가짜 뉴스들의 뿌리를 찾아들어가 보면, 최초의 정보 자체는 가짜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정보는 특히 과학관련 뉴스에 많이 있으며 이러한 정보를 저는 가짜가 아닌 가짜 뉴스라고 부릅니다. 정보자체는 가짜가 아니나, 그로부터 가짜 뉴스가 생성되게 유발하는 그런 기사들을 말합니다. 최근 뉴스에서 이와 비슷한 뉴스를 접하게 되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무엇보다 이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절대 가짜가 아닙니다. 모두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들이며, 이런 진짜 이야기에서 어떻게 가짜 뉴스가 출발할 수 있는가 설명을 위한 예로 말씀드립니다.
2019년 2월 9일 캐나다 모 뉴스 채널에서 “This Harvard scientist believes alien life may be nearby(외계 생명체가 지구 근처에 나타났다고 믿는 하버드의 과학자)”라는 제목의 꼭지를 방송했습니다. 이 꼭지의 내용은 정체를 모를 소행성물체가 태양계에 진입해 태양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데, 그것이 외계 생명체가 태양계를 탐사하기 위해 보낸 탐사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이 발표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과학계에서 새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이 미지의 물체는 2017년 하와이에 위치한 ‘팬-스타스(Pan-STARR)1’ 망원경을 이용해 하와이 대학교 소속의 캐나다인 천체물리학자 로버트 웨릭(Robert Weryk)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우선 태양계 내에서 처음으로 관측된 성간물질(interstellar object)로 관심을 끌었으며, 먼 곳에서 온 전달자라는 의미의 하와이 원주민 말인 “오무아무아(Oumuamua)”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성간물질이란 항성계와 항성계 사이에 위치하여 어느 항성계에도 소속되지 않은 방랑자 같은 물질들을 말하며, 우리들 입장에서는 태양계 바깥쪽에 위치한 물질들을 말합니다. 그 동안 관측된 혜성(comet), 소행성(asteroid) 등의 물질등이 모두 태양계 내부에 소속된 물체들인 것과 달리 오무아무아는 완전히 태양계 바깥쪽에서 유입된 물질이라는 것에 관련 학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후 관측된 내용들은 오무아무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금증을 더 크게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첫번째, 오무아무아의 형태가 다른 소행성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관측되었습니다. 먼 거리에 위치한 물체의 형태는 그 물체로부터 반사되어 오는 빛의 양을 측정하여 유추합니다. 성간물질, 혜성, 소행성 등은 모두 자전을 하며 움직이는데, 자전을 하는 동안 반사되어 지구로 도착하는 빛의 양이 일정하다면, 그 물질이 구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의 양이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면, 그에 따라 그 물체의 모습을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무아무아로부터 반사되는 빛은 일정주기를 갖고 약 6.6배증가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데, 이는 오무아무아가 한쪽면이 다른쪽에 비해 약 6.6배 긴 막대형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태까지 발견된 어떤 지구밖 물체들도 이렇게 긴 판형을 갖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오무아무아가 다른 천체와는 다른 무엇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두번째는 이 물체가 태양에 가까워지면서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소행성은 태양에 다가올수록 태양의 중력의 영향으로 감속효과가 생겨 속도가 느려지는데, 이는 이에 반대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 태양에 다가올 수록 속도가 증가하는 것은 혜성(comet)이 그러한데, 혜성은 큰 얼음덩어리로 태양에 다가올수록 표면의 얼음이 녹아버려 혜성 자체의 질량이 줄어들며 중력의 효과를 적게 받기 때문에 속도가 빨라집니다. 오무아무아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라면 표면에서 무엇인가 녹아 없어지면서 표면에 큰 변화가 생겨야 하는데, 현재까지 관측된 바에 의하면 표면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혜성과 같은 이유로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과 교수인 애브러험 로브(Abraham Loeb)는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적인 것들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어떤 목적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는 외계 생명체에 의해 만들어진 탐사선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셜록홈즈의 말을 인용하며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씩 제외시키고, 하나의 가능성이 남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일 수 밖에 없다(When you have excluded the impossible, whatever remains, however improbable, must be the truth.)”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추측이 황당하게 느껴진다하더라도 충분한 가설임을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무아무아라는 미스터리한 성간물체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는 그 어떤 거짓된 사실도 없어 보입니다. 모두가 관측된 사실이며 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설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를 가짜뉴스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기사를 접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1) 캐나다의 신뢰할 만한 큰 매체에서 방송한 내용이기에, 2) 하버드 대학이라는 유명한 대학의 교수의 주장이므로, ‘외계 생명체가 만든 길쭉한 모양의 탐사선이 인류를 관측하기 위해 탐사선을 보냈다’라고 받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한 개인의 생각이나 잘못된 추측이 ‘외계 생명체’ 같이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개인방송이나 SNS, 메세지 등을 통해 다수에게 전파하는 것이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해석이 실제 그 기사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실제 외계 생명체가 탐사선을 보냈다’, 혹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확인을 했다’라는 가짜 뉴스가 생성되고 퍼져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기사에 보면, 많은 과학자들이 혹시 모르는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오무아무아를 향해서 여러 형태의 통신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몇번의 전달을 통해 ‘오무아무아와의 통신에 성공했다’라고 왜곡되어 가짜뉴스로 변질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정보 과잉시대라고 하는 요즘, 일부러 나쁜 의도를 갖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가짜뉴스를 심는 경우보다 이렇게 사실이 오도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가짜 뉴스는 그것이 정말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해 퍼져나갑니다. 그렇게 때문에 가짜뉴스의 홍수를 비난하는 것에 중점을 둘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정보의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나 과학적 사실에 대한 정보들이 그러합니다. 어떤 음식에 항암물질이 들어있다라는 기사를 접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음식이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항암물질이 들어있다는 것이 다른 안좋은 물질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적 사실에 관련된 기사를 접하실 때 가장 좋은 접근 방법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말로는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입니다. 가짜뉴스가 아닌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무조건 옳은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가짜정보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9년 2월7일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1964년 어느날, 펜지어스(Arno Allan Penzias)와 윌슨(Robert Woodrow Wilson)라는 이름의 젊은 두 과학자는 미국 뉴저지 벨 연구소(Bell Lab)에 위치한 커다란 집채만한 실험장치인 혼 안테나(Horn antenna)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입을 굳게 다문채 비둘기의 배설물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칼텍,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당시 최고의 연구시설 중 하나인 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는 두 과학자가 비둘기의 배설물이나 치우고 있으니 신세한탄을 할 법도 하지만,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말 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혼 안테나를 이용해서 매우 미세한 신호를 읽어들여야 하는 실험을 진행 중인 이 두사람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잡신호를 제거하기 위해 이미 9개월여를 고생해 왔습니다.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이 잡신호가 얼마나 중요한 발견인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들의 인생역전이야기는 1960년 미항공우주국(NASA)이 에코 통신위성을 쏘아올리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무선 통신이라는 개념이 대중적이지 않던 당시 위성을 이용한 통신을 실험하고자 발사된 위성이 에코 위성입니다. 통신업계의 선두주자인 벨그룹은 위성을 이용한 무선통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측하고 에코 위성 계획에 참가하여 위성으로부터 들어오는 신호를 받아 증폭하는 리시버, 즉 안테나를 벨 연구소에 만들고 운영하는 부분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연구소 내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혼 안테나(Horn antenna)입니다. 길이 15미터, 폭과 넓이가 각각 6미터에 해당하는 대형 안테나의 모습이 커다란 소 뿔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혼 안테나라고 불립니다. 무선 통신의 잠재성을 예측했을 뿐 어떤 실현 가능성들이 있을지 아직 잘 모른 벨 연구소는 이 에코위성과 혼 안테나의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젊은 천체 물리학자 두명을 영입했는데, 이때 벨 연구소에 들어온 과학자가 바로 펜지어스와 윌슨입니다. 벨 연구소는 좋은 환경의 연구소임에는 확실하지만, 통신회사가 경영하는 연구소로서 순수 과학보다는 응용과학쪽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순수 천체 물리학자의 영입은 흔한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연구소는 이 젊은 두 과학자에게 최첨단의 기계를 이용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고, 이 두 과학자는 지구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신호를 측정해 우리은하(Milky way galaxy)의 상세 지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랜 기간 은하에서 들어오는 미세한 신호를 읽어들이기 위한 셋업을 만드느라 고생한 두 과학자는 첫 데이터를 받아들인 후 큰 실망에 빠졌는데, 안테나에 잡히는 잡신호가 읽어들여야 하는 신호보다 너무나 커 데이터를 받을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잡신호를 없애기 위해 9개월이상을 고민하고 실험하기를 거듭했지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도 이 잡신호를 없앨 수 없어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말이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확인을 해봤습니다. 같은 고도상에 위치하고 수십킬로 밖에 떨어지지 않는 맨해튼에서 만들어지는 신호들이 잡히는 것인지, 당시 비밀리에 이루어지던 핵폭탄 폭발 실험에 의한 노이즈인지, 태양계 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인지 등을 하나하나 확인해 봤습니다. 급기야 안테나 내부에 비둘기들이 만들어 놓은 배설물들이 전자기파의 간섭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안테나에 드나드는 비둘기들을 잡고, 그 배설물들을 깨끗이 청소하기까지 이른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의 노이즈는 그들의 데이터 측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윌슨의 어느 강연에 따르면, 이제는 그 주제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펜지어스가 MIT의 동료 학자 버니 버크(Bernie Burke)와 통화하던 중 잡신호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게되고, 이 이야기를 들은 버니는 펜지어스에게 프린스턴 대학의 밥 딕키(Bob Dicke)에게 연락해 볼 것을 권합니다. 밥은 당시 우주의 기원에 대해 연구중이던 과학자로 우주로부터 들어오는 신호들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과학자였습니다. 펜지어스는 바로 다음날 밥에게 전화를 걸어 수수께끼의 잡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조용히 전화 통화를 하던 밥은 수화기를 내려 놓은 후 자신의 연구진들에게 “여러분, 우리 실험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수년간 찾으려고 노력해온 빅뱅이론의 증거를 벨 연구소의 두 과학자가 완벽하게 찾아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두 과학자, 펜지어스와 윌슨이 일년 가까이 제거하고자 노력했던 잡신호는 사실 프린스턴의 밥 딕키 연구진이 수년간 찾고자 했던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입니다. 지금은 많은 과학자들이 13.5억년전 한점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지금까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이론(big bang theory)를 우주 탄생에 대한 정설로 믿고 있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많은 과학자들은 정상우주론(Steady State Theory, 우주는 변화하지 않고 시공간에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라는 설)을 더 많이 믿었습니다. 1930년 이후 몇몇의 과학자들에 의해 우주가 고정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빅뱅이론은 그 중에 한가지였습니다. 밥 딕키는 정상우주론대신 빅뱅이론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빅뱅이론이 맞다면, 폭발직후 급작스러운 팽창에 의해 생성된 낮은 에너지의 전자기파(마이크로파, microwave radiation)이 우주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렇게 퍼져있는 마이크로파를 발견한다면 이것은 빅뱅이론의 완벽한 증거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이 마이크로파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어느날 뉴저지의 두 과학자로부터 일년 가까이 아무리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가 되지 않는 노이즈의 정체를 모르겠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들이 없애려는 신호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후, 펜지어스와 윌슨은 그들의 측정값들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고, 밥 딕키의 연구진은 그 측정이 빅뱅이론을 뒷받침하는 우주배경복사라는 이론적 뒷받침을 하는 논문을 각각 발표함으로써 바야흐로 빅뱅이론의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이들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지속된 천체물리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현재 우리는 우주 전체에 퍼져있는 우주배경복사의 상태를 더 세밀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의 회고에 의하면, 밥의 제안에 따라 논문을 쓸 때조차 그들은 그 논문이 물리학의 한 획을 긋게 되는 발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데이터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비둘기 배설물까지 치우게 했던 그 잡신호가 그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고, 인류에게는 우주의 신비를 좀 더 알아낼 수 있는 열쇠가 된 것입니다.
(2019년 1월 24일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컬럼입니다.)
지난 1월 22일 구글 검색엔진 사이트의 로고는 보통때와 달리 훤칠한 노신사의 얼굴과 알 수 없는 몇가지 그래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구글 사이트는 특별한 날이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첫 화면의 로고를 새롭게 디자인하곤 하는데, 이를 두들(doodle)이라고 합니다. (Doodle은 ‘낙서’, ‘끄적임’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잘 알려진 특별한 날들을 두들을 이용해서 나타내기 때문에 금방 그 뜻을 알 수 있지만, 이 노신사의 얼굴은 아마도 많은 분들이 ‘누구지?’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셨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노신사의 이름은 레프 란다우(Lev Davidovich Landau, 1908-1968)입니다. 지난 1월 22일은 그의 111번째 생일이 되는 날이고, 올해는 그가 사망한지 만으로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란다우는 1908년 지금은 독립된 공화국인 아제르바이잔(당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수도인 바쿠에서 태어났습니다. 공학자인 아버지와 내과의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수학과 과학분야에 천재성을 나타내었고, 13세에 이미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 과정을 마쳤습니다. 바로 대학에 입학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바쿠 경제 전문학교(Baku Economic Technikum)에 입학했지만, 일년뒤 바쿠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이곳에서 전문적인 수학, 물리학, 화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19세의 나이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으로 진학하여 레닌그라드 물리 공학 연구소에서 일하던 때에 이미 란다우는 양자역학에 관련된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무서운 잠룡이었던 란다우가 물리학계의 핵심인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1929년 덴마크, 영국 등 유럽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서 였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보어,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의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20년이 넘도록 다져진 양자역학라는 분야가 그 기초를 거의 완성했을 무렵, 란다우는 비록 일년반정도의 짧은 기간이지만 유럽 전역을 돌며, 양자역학의 선구자였던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지식과 과학사조를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이론 물리 연구소에서 닐스 보어에게 사사받은 후 평생 보어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게 되고, 영국 캠브리지 연구소에서 폴 디렉(Paul Dirac), 스위스에서는 파울리(Pauli)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모두 생소한 이름일 수 있으나, 쉽게 말씀드리면 당대에 살아있는 대부분의 노벨 물리학 수상자들에게 직접 그들의 연구내용을 사사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학기간 동안 굵직굵직한 연구 결과들을 발표한 란다우는 이후 레닌그라드 물리 기술 연구소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양자역학분야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론 물리학 분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중요한 발견들을 쏟아냈습니다. 금속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자의 이상현상과 관련한 란다우 반자성(Landau diamagnetism), 양자 역학 계산의 기본 수학도구에 해당하는 밀도행렬(density matrix), 자기장 속에서 움직이는 입자를 이해하기 위한 란다우 준위(Landau level), 초전도체를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Ginzburg-Landau Model), 플라즈마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란다우 감쇠현상(Landau Damping), 등 현대물리학을 공부한다면 어떤 분야를 공부하던지 상관없이 란다우라는 이름을 피해가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분야에 많은, 심지어 그 모든 분야들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이론들을 밝혀내고 알아낸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였습니다. 란다우가 집필한 책중 하나인 이론 물리학 강의록(Course of theoretical physics Vol. 1)에는 천사처럼 날개가 달린 란다우가 선생님자리에 앉아 가르침을 주고 있고, 학생 자리에 앉아있는 당나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란다우의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을 그린 우스꽝스러운 삽화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을 당나귀에 비교하면, 란다우의 천재성은 거의 신적인 존재라는 의미의 이 삽화는 란다우라는 물리학자를 설명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그림입니다.
이렇게 굉장한 물리학자였으나 냉전시대 소련의 박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1937년에서 38년 사이 스탈린이 일으킨 소련 공산당 대숙청때 독일 간첩이라는 누명을 받아 구속되었지만, 카피차(1978년 노벨 물리학 수상자) 등의 동료 과학자들이 그의 결백을 주장하고 탄원을 넣는 등의 노력을 통해 석방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해 온 란다우는 1962년 트럭과 정면충돌하는 큰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이후 란다우는 한 달 이상을 의식불명 상태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살려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전세계 물리학계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냉전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서방세계의 의료진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다시 연구를 시작할 정도로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사후에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노벨위원회의 수상자 선정 기준때문에, 란다우가 죽기 전에 노벨상을 수여해야 한다는 청원이 이어졌고, 사고를 당한 해 196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지만, 시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사고 후유증에 고생하던 란다우는 1968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과학사에 이어지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 현대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이후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을 꼽습니다. 파인만은 란다누보다 열살 아래인 당시 함께 활동했던 과학자입니다. 란다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천재 물리학자들의 레벨을 나누어 이야기했습니다. 0-5등급으로 나누었고 0등급에는 뉴튼, 0.5등급에 아인슈타인, 1등급에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렉, 슈뢰딩거, 2등급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켰고, 2-4등급은 교과서에 나오는 다른 물리학자들, 5등급은 그외의 모든 물리학자들이라고 구분했습니다.이 계보에 따르면 파인만은 교과서에 나오는 물리학자 정도에 해당하니 적어도 본인은 파인만보다는 더 천재스러운 과학자로서 자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자만심이 넘치고 안하무인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들을 살펴보면, 자만심이 아니라 자부심이고 안하무인이 아니라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과학자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냉전시대의 소련의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인슈타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파인만만큼은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을 란다우.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축을 세운 그의 111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글을 마칩니다.
(2018년 9월6일자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의 귀족출신 도박사 드 메레(Antoine Gombaud, Chevalier de Mere, 1607-1684)는 주사위를 이용한 단순한 도박을 즐겨했습니다. 그는 주사위 하나를 네번 던져서 6이 적어도 한번 나오는 것과 주사위 두개를 스물 네번 던져서 동시에 두 주사위가 6이 되는 것이 한번이라도 나오는 것 중 어디에 돈을 걸 것인가라는 내기를 제안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걸게 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스믈 네번, 즉 네번보다 무려 여섯배나 많은 찬스가 주어지는 두번째의 경우가 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두번째에 돈을 걸었고, 경험적으로 첫번째의 경우가 더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드 메레는 쉽게 돈을 벌곤 했습니다. 단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왜 첫번째의 경우가 더 확률이 높은 것인지 궁금했던 드 메레는 친한 친구이자 유명한 수학자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게 이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드 메레에게 설명해 주면서 흥미를 느낀 파스칼은 도박에 얽혀있는 더 많은 수학적 원리들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이를 당시 판사이자 수학자이었던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7-1665)와 함께 고민해보기 시작하면서 현대의 확률론이 학문적으로 발달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드 메레의 도박 원리를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주사위에는 여섯 개의 숫자가 있고, 정상적인 주사위라면 여섯면이 나올 확률은 모두 같기 때문에 주사위를 한번 던져서 6이라는 숫자가 나올 확률은 육분의 일(⅙)이 됩니다. 반대로 6이 나오지 않을 확률은 6이 나올 확률을 전체에서 빼면 되니, 1-(⅙) 즉 육분의 오(⅚)가 됩니다. 주사위를 네번 던졌는데, 네번 모두 6이 나오지 않을 확률은 (⅚)x(⅚)x(⅚)x(⅚)이 되며, 이를 전체(1)에서 빼면 네번의 기회중 적어도 한번 6이 나올 확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계산해 보면 0.5177, 즉 51.77%의 이길 확률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작 1.77%밖에 안되지만, 반반의 확률 50%를 넘으니 도박을 반복하면 할 수록, 돈을 딸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의 경우는 두 주사위를 동시에 던지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6x6, 즉 서른 여섯가지나 되고, 그중에 단 한경우만이 6과 6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이므로, 위와 비슷하게 계산해 보면 전체에서 (35/36)를 스물 네번 곱한 수를 뺀 값 1- (35/36)x(35/36)x….(35/36)=0.4914를 얻게 되며, 이는 돈을 딸 수 있는 확률이 49.14%라는 뜻입니다. 이는 50%보다 낮은 확률로서 내기를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돈을 잃을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51.77%, 49.14%는 둘 다 반반의 확률 50%에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에 의해서 도박의 성공여부가 결정된 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이 작은 차이의 엄청난 결과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수학과 오구리 교수(Hirosi Ooguri)는 자신의 책,”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 도박의 확률을 인생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확률 공식들을 이용해 도박을 통해서 기본자금으로부터 목표 금액을 달성할 수 있는 확률을 보여줍니다. 본 칼럼은 크게 수학적인 지식이 없는 분들도 부담없이 읽으실 수 있게 쓰는 것이 목적이니 실제 공식을 이곳에서 설명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실제 공식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구리 교수의 책이나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의 공식을 이용하면, 이길 확률이 p, 질 확률이 q(=1-p)인 한번에 1 달러씩 걸 수 있는 도박을 통해 초기자금에서 시작해 목표 금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상할 수 있듯이,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정확하게 50%씩이라면 처음에 시작한 돈을 두배로 불릴 수 있는 확률과, 처음 돈을 완전히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될 확률은 정확히 같습니다. 하지만,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아주 조금만 차이가 나더라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직접 오구리 교수의 공식을 이용해서 계산해본 결과 이길 확률이 49.5%으로 0.5%만 낮아지고 질 확률이 50.5%로 0.5%만 높아져도 10달러의 돈을 갖고 시작해서 20달러를 만들어 낼 확률은 45%로 떨어집니다.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초기 자금이 50달러로 높아져서 그 두배인 100달러를 만들어낼 확률은 26.9%로, 100달러로 시작해서 200달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확률은 고작 11.9%로 낮아져 버립니다. 그리고, 실제 카지노와 같은 도박업소들은 바로 이 작은 확률의 차이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돈을 벌어들입니다. 슬롯머신이나 룰렛과 같은 게임들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 이길 확률이 49%나 된다고 어느 카지노 매장에서 광고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49%면 50%에 매우 가까우니 이정도면 해볼만하다, 또는 그것도 사업이니 손님이 이길 확률이 50%를 넘게 해준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나, 상식적으로 49%정도면 엄청 해볼만 한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위에 공식으로 계산해 봤을 때, 이 확률에서 100불을 가지고 도박을 시작해서 200불이 될 확률은 1.79%로 말도 안되게 떨어져 버립니다. 49%나 되는(?) 승률에서 돈을 못따는건 단지 운이 없어서니 더 많은 돈으로 더 오랜 시간 투자하면 언젠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만, 수학의 결과는 그럴수록 더 많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박과 확률에 대한 수학적 이야기는 이정도에서 역시 도박은 할 수록 돈을 잃게 되니 안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며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오구리 교수는 여기서 획기적인 반전을 이야기하며 매우 흥미로운 또 하나의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만약,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반반에서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다면?’이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공식을 이용해서 다시 계산을 해봤습니다. 이번에는 이길 확률을 0.5%올려 50.5%를 만들고 질 확률을 49.5%로 낮춰 보았습니다. 그 조그만 변화만으로 100불을 200불로 만들 수 있는 확률은 88%로 치솟고, 이길 확률 51%의 경우에는 확률이 무려 98.2%, 즉 왠만해서는 돈을 두배로 불리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반전을 도박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길 확률을 갖고 있는 도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오구리 교수는 이 이론을 우리의 인생에 적용해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아니면 적어도 지금하고 있는 어떤 일에서 성공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는 도박에서 돈을 딸 것인가 아니면 잃을 것인가와 같은 이분법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여부는 아주 작은 여러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가 각각의 작은 스텝들을 잘 이루어낼 수 있는 확률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높여 준다면 이것이 바로 한판의 도박에서 작은 돈을 딸 수 있는 확률을 조금 올려주는 것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변화가 전체 업무, 나아가 전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확률을 98%를 육박하게 끌어올릴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새 학기가 시작했습니다. 12학년에 올라가는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각오를 다짐합니다. 무료하고 무언가 부족했던 그 동안의 생활을 반성하고 목표를 이루고자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학생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꿈꾸고 목표를 세우면 무언가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쉽게 만들지 못하면 핑계거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저런 것들은 내 지금의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들이니, 애초부터 그것을 이루는 건 불가능이었을꺼야’라는 식으로 목표를 향해 다가가지 못한 자신을 위로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언가 거대하고, 대단한 변화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아주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오구리 교수는 단순한 확률 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고가의 장비, 숙련된 기술, 엄청난 투자 등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한시간정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을 읽거나 산책하기, 허둥거리며 하루를 시작하지 않기위해 30분정도 일찍 일어나기, 3-4층정도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다녀보기 등 아주 작은, 하지만 우리에게 적어도 0.5%의 성공확률을 올려줄 수 있는 그리 어렵지 않은 변화들이 그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8년 11월 1일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옛날 옛날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주는 요술 맷돌을 갖고 있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이를 탐낸 도둑이 요술 맷돌을 훔쳐 멀리 달아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을 쳤습니다. 충분히 먼바다로 나왔다고 안심한 도둑은 당시 금보다도 더 비싼 소금을 만들어 달라고 맷돌에게 소원을 빌었고, 맷돌은 신기하게 소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신이 났지만, 맷돌이 만들어내는 소금은 이내 배안을 가득채우고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맷돌을 멈추는 방법을 몰랐던 도둑은 불어나는 소금을 멈추지 못해 끝내 맷돌과 함께 바다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고, 바다 속 어디엔가 가라앉은 맷돌은 지금까지도 소금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합니다.
기억이 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바다가 짠 이유에 대한 한국 전래동화 ‘소금을 만드는 맷돌’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네덜란드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의 동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두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비슷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인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상인들의 왕래 등을 통해 전해진 것인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동떨어진 두 지역에 비슷한 전래동화가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매일같이 음식을 만들며 엄청난 양의 소금을 소비함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여전히 짜다는 사실에 그 속에 소금을 생성해 내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할 것이라는 식의 접근으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꽤나 논리적인 상상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바다속에는 그런 맷돌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억년간 바다의 염분은 크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바다가 짠 맛이 나고 소금맷돌도 없이 염도를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바다에 유입되어있는 염분의 대부분은 원시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입된 것이고, 우리들이 사용하는 소금의 양은 바다 속 소금의 총량에 비하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양이며, 그마저 순환과정을 통해 다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전체 소금양에는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짠 바다에 대한 과학적 설명입니다. 약 46억년전에 형성된 지구는 지금과 달리 엄청나게 뜨거운 불덩이였습니다. 딱딱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그마가 액체로 흘러다니는 마그마 바다가 표면을 덮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마그마 바다가 서서히 식으면서 방출된 기체들이 대기를 이루고 고형화된 마그마들에 의해 최초의 지각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땅과 대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초기 지구는 이렇게 뜨거웠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물을 갖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지구에 많은 양의 물이 있게 된 것은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진 혜성들이 초기 원시지구에 빈번히 충돌하면서 물을 전달하였고, 이렇게 모인 수증기들이 응결하여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현재로서는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당시 대기에는 많은 양의 염산기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염소기체는 물에 잘 녹기 때문에 비에 녹아 물 속에 다량의 염소이온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염산, 황산 등에 의해 강한 산성을 띤 비는 땅에 포함된 많은 물질들을 녹여 바다로 스며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에 의해 많은 양의 나트륨이 물속에 들어오면서 다량의 소금, 즉 염화나트륨(NaCl, sodium chloride)이 바다에 유입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바다를 짜게 만들어주는 요술 맷돌은 바로 땅, 지구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화합물입니다. 바다에 가장 풍부한 염소와 나트륨이 생명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원소들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지구의 원시 생명체는 바다속에서 처음 만들어져 진화해 온 것인데, 최초의 생명체가 만들어질 때 바다속에 가장 풍부한 원소로 생명체가 탄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놀랍게도, 아니 매우 당연하게도 지구에 서식하고 있는 생명체들을 구성하고 있는 성분들은 바다 속 구성성분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원시지구에서부터 바다에 다량의 염분이 스며들지 않았다면, 우리의 몸에 소금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짭짤한 음식으로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시지구 형성과정이 바다가 짠 이유를 설명해준다면, 소금의 순환과정은 수억년이 넘도록 크게 변화하지 않고 유지되는 바다속 소금의 농도를 설명해줍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은 소금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생명체가 소금을 섭취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다에 저장되어 있는 소금의 양이 점점 줄어들어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명체에게 들어간 소금은 생명체가 죽어 땅에 묻힐 때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 이렇게 땅속에 스며든 소금을 강물이 쓸어내려 다시 바다로 되돌려 줍니다. 바다물이 증발할 때에는 소금기를 머금은 채로 증발되지 않고, 순수한 물만 공기중으로 올라갑니다. 이렇게 올라간 수증기들이 뭉쳐 비가 내리기 때문에 비에는 소금기가 거의 없습니다. 빗물이 모여 강줄기로 모여들면서 땅속에 있는 소금을 다시 가져오지만, 그 농도가 낮아 우리는 강물에서 짠맛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소금은 이렇게 거대한 순환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농도가 변화하지 않고 비슷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역적으로 조금씩 바다의 염분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비가 적게 오고 온도가 높아 증발이 쉬운 지역의 홍해나 페르시아해의 바다는 비가 많이 오는 밴쿠버의 앞바다보다 염분이 높습니다. 또 날씨가 추워져 북극해의 바다가 얼게 되면, 얼음속에는 염분이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남은 바닷물에 더 많은 소금이 들어와 바닷물을 상대적으로 더 짜게 만들기도 합니다.
바다는 짜지만 강물은 그러하지 않고, 우리들이 짭짤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수십억년전 지구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의 상태와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 일상 속의 아주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2018년 5월 31일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코끼리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라는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 한마리에 대해 손으로 더듬어 가며 힘들게 알아가고 있지만, 지금까지 만져본 부분이 그저 코끼리의 왼쪽 발가락뿐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만지고 있는 코끼리 외에 어떤 또 다른 동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코끼리 중 ‘중력(gravitation)’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는 정말 골치아픈 녀석중 하나입니다.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누구나 배우는 내용이기에 많은 이들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물리적 특성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하며, 더구나 왜 중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인된 바없는 이론들 뿐입니다. 물리를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물리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들 일수록 중력에 대해 아는 게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중력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천재 과학자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과 함께 시작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뉴턴이 세상에 중력에 관한 법칙을 들어내는 데에는 의외의 인물이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75년의 공전주기로 태양계를 가로질러 돌아다니는 핼리혜성으로 유명한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가 그 주인공입니다. 사실, 핼리는 핼리혜성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닙니다. 핼리는 혜성의 공전성을 처음으로 예측하고 다음 핼리혜성이 다시 태양 근처로 오게되는 시점을 정확하게 예측한 과학자입니다. 후대 과학자들이 그의 업적을 높이 여겨 그의 이름을 혜성에 붙여줌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딴 혜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혜성의 공전성에 대해 연구하던 핼리는 어느날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도움을 얻기 위해 당시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있던 뉴턴을 찾아갑니다. 기록에 의하면 공식적인 방문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리는 정도의 만남이었다고 합니다. 핼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뉴튼에게 혜성이 만약 태양의 어떤 힘에 의해 태양계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이라면 그 궤도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를 물었고, 뉴튼은 무심한듯 그건 타원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오랫동안 고민해도 답을 얻지 못한 부분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답을 해주는 뉴턴에게 어찌 그렇게 쉽게 답을 할 수 있는지 묻자, 뉴턴은 ‘이미 계산을 해본 것이니까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핼리는 이렇게 중요한 발견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뉴턴을 설득했고, 이에 뉴턴은 중력에 관한 연구를 정리하여 1687년부터 1726년까지 세권의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책을 출간하게 됩니다. 핼리가 뉴턴에게 혜성 궤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중력에 대한 비밀은 더 오래 베일에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뉴턴의 중력법칙이 세상에 알려지자 온 세상의 과학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달이 지구주변을 도는 이유, 혜성이 주기를 갖고 태양계를 돌아다니는 이유,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모든 이유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한 식이 발표되었으니 사람들은 뉴턴을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으로 추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뉴턴 덕분에 우리는 이 우주의 기본법칙들에 대해 완벽하게 알아냈다고 떠들었습니다. 드디어 ‘중력'이라는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이후 약 200여년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1900년대 초 아인슈타인이라는 또 다른 한명의 신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은 자가 나타날 때까지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대한 주인공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 무거운 질량을 갖는 물체들은 서로 잡아당기며, 우리가 지구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구가 우리를 지구 중심으로 잡아당기는 힘, 즉 중력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중력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무거운 질량을 갖는 지구가 아니라 그 주변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자주 탄력이 좋은 양탄자 위에 놓인 볼링공을 이용합니다. 고무와 같이 탄력이 매우 좋은 양탄자가 있고, 그 네 귀퉁이를 네 사람이 잡아당겨 공중에 양탄자를 펼쳐놓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위에 가볍고 작은 목각인형을 살며시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양탄자 정 가운데에 무거운 볼링공을 살며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무거운 볼링공은 탄력좋은 양탄자를 늘어뜨리며 아래로 축 처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처음에 놓아둔 목각인형은 어떻게 될까요? 양탄자가 늘어짐에 따라 볼링공쪽으로 굴러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목각인형을 볼링공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 것은 볼링공이 아니라 볼링공의 무게때문에 늘어져버린 양탄자라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 주변의 공간(space)을 탄력 좋은 양탄자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공간에 무거운 지구가 위치하면 주변의 공간이 양탄자와 같이 늘어남의 효과를 갖게 되고, 그 주변의 물질들이 지구쪽으로 쏠리게 되며, 이것이 우리가 지구가 잡아당기는 것으로 느끼는 중력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양탄자는 2차원의 평면이지만 공간은 3차원의 입체이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조금 표현을 바꿔보자면, 우리가 지구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지구가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공간이 우리를 지구에 꾸욱 누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공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우리를 지구쪽으로 누르고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지만, 현대의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설명이 중력의 실체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중력이라는 ‘코끼리'의 실체를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뉴튼의 중력에 대한 설명은 코끼리의 발톱, 아인슈타인의 설명은 왼쪽 다리 허벅지정도에 해당하는 정도일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현대 과학에서 중력에 의한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는 중력자(graviton)이라는 입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중력에 대한 이해가 맞다는 확실한 도장을 받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은 지금도 중력자 검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만약 끝까지 검출이 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중력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아직도 중력이라는 ‘코끼리’에는 더듬어 봐야 할 곳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험을 통하고,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수정될 수도, 어쩌면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는 것이 과학적 진리들입니다. 역사속에서 수많은 과학적 진리들이 폐기되기도 하고, 고쳐지면서 지금의 과학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우주의 진리에 가까이 왔다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도 뉴턴 시대의 과학자들이 뉴턴의 중력 법칙에 열광했던 것과 같은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과학자들은 내가 밝혀낸 진실이 코끼리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수도 있다고 경계하며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조금 더 새로운 부분을 더듬어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8년 5월17일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지난 5월 4일 한국의 한 유명 브랜드 침대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된 후 한국 사회는 방사능 공포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무서운 방사능이 나오는 물질이 매일 누워서 자는 침대에 들어있다니 당황스럽고 공포스러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더욱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만드는 것은 제작이나 유통단계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잡아낼 제도적 장치가 아직 없다는것입니다. 이번에 보도된 사실이 밝혀진 것도 일반 사용자가 보급형 라돈 측정기를 갖고서 호기심에 자신의 침대를 측정해보다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방사능. 이런 방사능과 관련되고 심지어 방사능을 직접적으로 내뿜는 물질은 모두 엄격히 통제되고, 적어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생활 공간에는 있어서는 안될 물질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매일 잠을 자는 침대에 사용되어 우리들을 방사능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분개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방사능이라는 단어가 포함 된 뉴스 타이틀이 매번 이같은 엄청난 소요를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방사능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오해가 가장 큽니다.
100여년전 방사성 물질들이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물질들이 이용되었지만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시계침을 스스로 빛을 내도록 만들기 위해 시계침에 방사능 물질을 바르던 시계 공장의 종사자들 대부분 설암이 걸리는 등의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뒤 늦게 방사선의 위험성을 알게 된 과학자들은 방사선피폭량(얼마나 많은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는가)에 따라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알아내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데이터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임의로 방사선을 조사해 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이미 일어난 사고 등을 통해 그 데이터를 수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데이터들은 대부분이 원자폭탄 피폭 피해자, 체르노빌 사고 생존자 등과 같이 강한 방사선에 짧은 시간동안 피폭당했을 때에 대한 정보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강한 방사선에 급작스럽게 노출된 경우, 방사선량과 그에 의한 피해의 정도는 선형관계를 갖습니다. 즉, 방사선량이 두배로 증가하면 그에 대한 피해도 두배로 증가를 합니다. 하지만, 낮은 방사선에 오랜시간 피폭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충분한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수학적 모델을 근거로 유추를 해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물론 직업상 방사선 노출빈도가 일반인들보다 높은 방사선관련종사자들이 받는 방사선의 양과 그들의 건강상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함으로써 저방사선 피폭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관계를 단정짓기에는 데이터의 양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방사선양 피폭에 따른 피해를 유추하기 위한 수학적 모델은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첫번째는 강한 방사선과 같이 선형관계를 보이는 것입니다. 방사선량이 두배일 때 피해도 두배가 되는 것처럼, 방사선량이 반이라면 피해량도 반, 방사선량이 십분의 일이라면, 적은 양이긴 하지만, 피해도 십분의 일정도의 피해를 입게 된다는 가정입니다. 즉,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선도 그에 해당하는 피해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입니다.
두번째 모델은 일정 임계값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방사선량이 일정값보다 크다면 고방사선과 같이 선형적인 피해량을 보이지만, 방사선의 양이 일정값보다 낮다면 인체에 피해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맞다면 일정값보다 낮은 방사선은 아무리 오래 피폭당한다고 해도 인체에 피해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모델은 방사선 호르메시스(radiation hormesis)라는 것인데, 적은 양의 방사선에 노출이 되는 피해값은 수학적으로 음수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피해가 음수라는 이야기는 즉, 이득이 생긴다는 것으로 적은 양의 방사선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도구가 되거나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말벌침을 이용해서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이 적은 양의 독은 오히려 약이 된다는 개념은 매우 오래된 생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40대이상정도의 분들은 한국에 사실 때, 한 때 유행했던 ‘라돈탕’이라는 동네 목욕탕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적은 양의 방사능 물질, 즉 라돈을 함유한 물에서 목욕을 하면 건강에 좋다라는 것으로 정확히 호르메시스에 해당하는 아이디어입니다. 그 때 목욕탕 물에 함유되었다는 라돈이 요즘 침대에 있는 물질과 동일한 방사성 물질이고, 라돈이 녹아있는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했으니 어쩌면 그때 피폭받은 방사선의 양은 지금의 침대와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강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가지 모델 중 어느 것이 정확히 맞다라고 말하기에는 말씀드렸듯이 아직은 정확히 확인 된 데이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일단은 피해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첫번째 모델을 근거로 방사성물질의 위험도를 예측합니다. 그에 따라서 방사능에 대해서는 ‘ALARA(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 가능한 적은 양의 피폭)’을 안전 수칙을 정하는 가장 기본원칙으로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방사선 피폭양은 무조건 가장 적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방사능피폭량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방사선 피폭량에 대한 단위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방사선 관련 단위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위는 베퀘렐(Bq)과 시버트(Sv)입니다. 베퀘렐은 방사성 물질이 얼마나 빠르게 붕괴를 하느냐에 따른 단위이고 시버트는 그 방사선 붕괴에 의한 생물학적 효과까지 고려한 값입니다. 즉 두개의 다른 방사성 물질이 동일한 베퀘렐 값을 갖는다는 것은 방사성 물질들은 붕괴속도가 서로 같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방사선 종류에 따라 피해가 다를 수 있고, 또 일반 근육인가 눈이나 뇌와 같은 신경조직이 많은 부분인가에 따라 그 피해정도가 다를 수 있기에 시버트값은 다르게 측정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방사선에 의한 피해를 이야기할 때에는 시버트 단위값을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번 침대 사건에 대한 기사 중 침대에서 몇 천 베퀘렐이나 되는 방사선이 검출되었다라는 식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위가 생소하신 분들은 ‘몇천’도 ‘베퀘렐’도 아닌 ‘이나’라는 표현에만 현혹되어 그 값이 얼마인지, 또 관련이 있는지 조차 모르시고서 ‘엄청나게 많은 양이 나왔구나’라고 생각하시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던 기사였습니다. 이는 ‘다이어트를 위해 86,400초나 밥을 굷었다구’라는 친구에 말에 ‘세상에! 그렇게 오래?’라고 반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86,400초는 고작 1일에 해당하는 시간일 뿐입니다.
5월 15일자 기사들을 보면 원자력 안전 위원회의 조사 결과 해당 회사의 침대 매트리스 중 몇 모델에서 최대 연간 최대 9.35mSv의 방사선량이 측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일반인들의 방사성피폭 허용치인 1mSv의 약 아홉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일반인이 아닌 방사선관련직업종사자들의 경우 연간 허용치가 50mSv (5년내 100mSv 이하)인 것에 비교하면 ‘수치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값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저방사선에 대한 데이터가 적기 때문에 허용치 기준 역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낮게 잡아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고된 방사선의 양과 허용 제한치와는 차이가 꽤 있습니다. 수치상으로 낮기 때문에 현재 그에 대한 관리감독이 법적으로 규정되어있지 못한 것이고, 그것이 침대 회사조차 그 심각성을 모르고 오랜 기간 판매를 해 온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번 더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라돈성분이 함유된 침대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데이터상으로 낮은 수치라고 하지만, 매일 인체와 장시간 접촉을 할 수 밖에 없는 침대가 일반인 기준치를 9배나 넘긴다는 것이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으며, ALARA 원칙에 의해 그 위험성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라돈은 알파붕괴를 하는 방사성 원소이며 상온에서 기체상태로 존재하는 물질 중 가장 무거운 비활성기체입니다. 방사성 붕괴를 하며 알파입자(헬륨의 원자핵)를 내놓는 것을 알파붕괴라 합니다. 알파입자는 소립자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매우 큰 입자로 종이 한장도 뚫고 지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알파붕괴를 하는 물질들은 잘 밀폐된 상자 등에 담아두기만 한다면 인체에 해롭지 않습니다. 집집마다 있는 스모크디텍터 역시 알파입자를 이용하는 것으로 배터리를 교환하시거나 하실 때, 천장에서 떼어 안쪽을 자세히 보시면 방사선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방사성 물질을 천장에 붙여 놓고 살아왔다니’라고 놀라실 분이 계실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안전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혹시 노출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피부를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인체에 주는 피해는 거의 무시할 만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무시할 만한 피해는 알파입자가 신체 밖에 있을 때, 즉 외부피폭만을 말합니다. 이러한 알파붕괴 입자가 호흡을 통해 인체, 특히나 폐의 내부로 들어가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폐속에서 방어벽없이 우리의 폐 내벽을 알파입자가 공격한다면 폐암의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돈은 다른 원소들과 반응을 하지 않는 비활성기체이기 때문에 호흡에 의해 몸에 들어간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 다시 몸밖으로 빠져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잠을 자는 침대에서 가습기처럼 라돈이 뿜어져 나온다면 지속적으로 호흡에 의해 내부피폭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라돈은 가장 무거운 기체이기에 아래쪽으로 가라앉는 성질이 있어 주변의 공기를 몰아내고 잠자는 사람 주변을 감싸게 될 것이기에 내부피폭의 위험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낮은 방사선에 관한 법률이나 조항이 없기 때문에 침대 제조사를 문을 닫게 하거나 관련자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과 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심각성을 알기에 제조사는 전량 리콜을 하는 등 자신들이 해야할 후속조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몇몇의 소비자들은 법적 제재가 없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리콜하기 귀찮다, 여태 아무 문제없었다 등의 이유로 리콜을 안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으나 이는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방사선은 그 존재와 심각성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기에 더욱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만약 해당 침대를 갖고 계시다면 귀찮아하지 마시고 리콜 프로그램에 참여 하셔야 할 것이고, 혹시 캐나다에서 사용하고 계셔서 리콜이 불가능하시다면 플라스틱백에 잘 담아두셔야 합니다. 입구를 잘 막아서 보관하신다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알파입자는 플라스틱백을 뚫고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지난 2018년 12월27일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컬럼내용입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제 연말연시가 다가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평소에 말을 잘 안듣던 꼬마아이들도 갑자기 부모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가능한 착해보이려고 노력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서지요. 저희 아이들은 올해 드디어 조금씩 의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심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섭섭하셔서 선물을 안주실 수도 있다는 말에 자신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산타할아버지에게 ‘전해달라며’ 엄마 아빠에게 부탁하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웃음 참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산타 할아버지는 밤새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녀야 합니다. 산타는 과연 얼마나 빨리 돌아다녀야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선물을 모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몇가지 단순한 가정을 통해서 조금 근거없는 재미있는 계산을 해볼까 합니다.
지구 전체의 약 71%는 바다로 덮여 있고, 육지의 면적은 약 1억 4900만 제곱킬로미터정도입니다. 이중에 인류가 밀집해서 살고 있는 도시의 지역은 전체 육지의 약 2%에 해당합니다. 2000년대 산타의 움직임에 대한 수학적 분석을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의 래리 실버버그(Larry Silverberg) 교수에 따르면 종교에 상관없이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약 2억명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모두 대부분의 인간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고, 각집에 2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으며, 각 집들이 모두 동일한 간격으로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고 단순화하여 가정하면, 산타가 2억명의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하루 밤동안 돌아다녀야 하는 거리는 약 2,980,000킬로미터라고 계산됩니다. 시간변경선을 고려하면 전세계에 밤이 걸쳐있어서 산타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약 31시간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각 집에 들리기 위해 가속, 감속을 해야하는 것을 무시하고 등속도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위에 가정들에 따르면 산타의 썰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 96,129 km/hr의 속도로 돌아다녀야 합니다. 이를 기본 단위계를 이용해 환산해 보면 1초당 2만6천미터를 날아가는 속도입니다. 빛의 속도의 0.0089%밖에 안되는 속도이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에 의한 시간 확장(time delay), 길이 축소(length contraction) 등의 효과는 무시해도 되지만, 음속에 비교하면 소리보다 무려 76배이상 빠른 속도에 해당합니다.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어 둔 쿠키와 우유를 산타할아버지가 드시지 않고 가시는 건 아마도 맛난 음식을 즐길 시간이 없으셔서 일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단지 쿠키를 먹을 틈도 없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비행을 계속 하면 엄청난 양의 소닉붐(sonic boom)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생깁니다. 물체가 음속보다 빠르게 비행을 하면 자신이 만들어낸 소리보다 더 앞서 나가게 되면서 공기가 급격한 압축, 팽창을 일으키며 큰 폭발음을 만들게 되는데, 이를 소닉붐(sonic boom)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 주변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소리를 들으신다면, 폭죽 소리가 아니라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가 초음속 비행을 하는 중에 만들어진 소닉붐을 들이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산타할아버지의 썰매는 말도 안되는 빠른 소리로 돌아다녀야 하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2억명이라면 선물 하나당 무게가 500그램이라고만 쳐도 전체 선물의 무게는 1억 킬로그램이 됩니다. 산타와 사슴, 그리고 썰매자체의 무게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무게가 됩니다.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산타가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구전되어 온 바이킹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이야기에 따르면 루돌프와 함께 썰매를 끄는 사슴은 총 여덟마리라고 합니다. 보통 사슴 한마리가 끌 수 있는 무게는 약 150킬로그램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1억킬로그램에 달하는 선물이 담긴 썰매를 끌기 위해서는 약 6십만마리 이상의 사슴이 필요한데 이를 여덟마리의 사슴이 끌고 다녔다고 하니, 어쩌면 루돌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귀여운 꽃사슴이 아니라 켄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 괴물)와 비슷한 우락부락한 사슴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은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앤트맨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선물의 사이즈를 콩알만하게 줄일 수 있다면 (그래서, 무게도 함께 줄일 수 있다면) 무게와 우락부락한 루돌프에 대한 문제는 해결이 가능해 집니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에서도 북극에 위치한 산타의 집에서 산더미같은 선물상자들을 썰매에 실은 뒤 요정들이 마법을 통해 선물들을 산타의 빨간 보따리에 모두 집어넣어 주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작아진 선물들을 각집에 도착해서 다시 원래 크기로 돌려주는 방법으로 선물을 전달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산타의 보따리를 선물을 담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선물을 순간이동시킬 수 있는 ‘텔레포트(teleport)’의 게이트로 사용하는 겁니다. 선물을 들고 다닐 필요없이 산타의 집에 쌓여있는 선물들이 하나씩 보따리를 통해 각 집의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로 순간이동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해결책 중 하나는 북극의 산타 할아버지가 각 지역에 숨은 산타들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문어발식 다단계 기업과 비슷하게 북극의 산타의 역할을 다수의 산타의 대역들이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처음 두가지 방법은 어쩌면 언제가 과학적으로 가능해 질 수도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현재의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들이지만, 언젠가는 현실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어쩌면 전혀 생각지 못한 다른 방법들이 가능해 지면서 산타의 수고를 덜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아마도 그런 기술들이 가능해진 뒤에도) 세번째 말씀들인 다단계식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해 주게 될 것입니다. 현재, 그리고 과거에도 그랬듯이 각 집에 있는 산타의 대역들이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아침의 기쁨을 대신 전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입니다.
제 친구 아들은 산타의 실체를 꼭 녹화하겠다며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몰래 스마트폰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산타의 대역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기를 바라며,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던 아이들이 자라서 언젠가는 산타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합니다.
(2018년 6월28일자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되었던 칼럼입니다.)
며칠전 코퀴틀람에 사시는 친한 지인분이 요리 중에 화상을 입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칫 잘못하면 온 얼굴까지 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던 큰 사고였습니다. 사골 곰탕을 슬로우 쿠커(slow cooker)로 밤새 끓인 후 다음날 아침 압력이 안전하게 다 빠진 솥 뚜껑을 열 때까지도 아무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재가열하다가 뼈를 건져내기 위해 집게를 탕에 넣는 순간 갑자기 ‘펑’하고 곰탕이 폭발했다고 합니다. 보통 압력솥으로 요리를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면, 압력솥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고 요리를 하던 중, 압력을 못 이겨 터져버리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압력이 다 빠진 후 뚜껑도 열어놓고 다시 재가열하여 끓이던 중 벌어진 일이라 당하신 분도 정말 황당했다고 합니다.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되실 수도 있지만, 사실 어머님들이 주방에서 요리하실 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현상을 돌비현상(bumping)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물질이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액체를 가열할 때, 끓는점보다 높은 온도까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기포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물이 끓지 않고 있다가 기포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면 갑작스럽게 커다란 기포를 형성하면서 폭발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보통 물을 가열하여 끓는점에 이르면, 표면의 물만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수증기로 기체가 만들어져 기포형태로 표면으로 끓어오르게 됩니다. 물을 끓일 때마다 보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기포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물의 입장에서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기포가 만들어지는 것은 물표면에 입자들이 서로 잡아당기는 힘, 즉 표면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표면장력은 물방울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 수록 반대로 커집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만들어 내는 비눗방울이 크면 클수록 더 형태를 유지하기 힘들고 쉽게 터져버리는 것을 생각하시면 방울의 크기와 표면장력의 관계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기포가 작으면 작을 수록 표면장력이 커진다는 것은 물이 막 끓기 시작할 때 만들어지는 가장 작은 기포는 엄청나게 큰 표면장력을 이겨내고 만들어져야 한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물속에서 기포가 생성되는 현상은 이렇게 큰 힘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물을 끓일 때 끓어 오르는 기포들은 대부분 없던 기포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냄비 바닥의 흠집, 물속의 이물질 속에 숨어있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기포가 씨눈이 되어 올라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물속에 기포를 제거하고 물을 끓이면 물은 끓는점 100도씨를 훌쩍 넘어서까지 끓어오르지 않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끓는점을 넘었는 데도 끓지 않는 상황을 과열상태(superheated state)라고 합니다. 이 때, 기포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 갑자기 커다가 기포를 만들며 폭발하는 것이 바로 돌비현상입니다. 이런 과열 상태의 물에 집게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이 바로 기포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만족시켜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기포가 만들어지지 않는 조건, 즉 이물질이 없는 순수한 물이 아니라 곰탕을 끓이다 벌어졌습니다. 사실, 주방에서 돌비현상이 일어나는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전자렌지로 물을 데우는 경우입니다. 뜨거운 물을 전자렌지에 집어넣고 2분이상정도 데우면 돌비현상을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일부러 해보시는 것을 권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 건더기가 많이 들어가 있는 곰탕을 끓이면서도 돌비현상에 의한 폭발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곰탕 폭발의 원인은 이물질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기포생성이 억제되었는가 아닌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사고가 난 상황을 다시 잘 짚어보면, 일단 밤새 압력 슬로우 쿠커를 이용해서 오랜 시간동안 곰탕을 끓였습니다. 이 때 곰탕이 끓으면서 많은 양의 기포가 만들어져 올라왔을 것입니다. 이후 압력솥에서 압력이 빠져나가는 동안 일반적으로는 일정양의 수증기가 다시 국물로 들어가게 되는데, 곰탕의 경우는 맨위에 만들어진 기름층이 한번 빠져나온 수증기가 다시 국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압력이 빠져나가면서 대부분의 수증기는 이미 국물을 빠져나간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솥 안쪽과 바깥쪽의 압력은 조절이 되었으니 아침에 뚜껑을 열 때도 아무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조금 더 끓이기 위해 재가열을 할 때, 이미 국물 속에는 기포를 생성할 수 있는 작은 기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과열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국물 위에 떠있는 기름층은 조금이라도 생길 수 있는 기포의 생성마저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과열상태에 들어간 국에 집게가 닿아 기름층이 갈라지고 기포생성이 가능해지자마자 국물은 돌비현상을 일으키며 폭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압력솥을 연 후, 충분히 식어 있을 때 기름을 먼저 제거하고 한두번 국물을 저어준 다음에 다시 가열하였다면 이런 폭발은 없었을 것입니다.
화학실험을 할 때에는 순수한 액체를 가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돌비현상을 막기위해 ‘끓임쪽(비등석, boiling chip)’이라는 것을 넣고 가열을 합니다. 미세 구멍이 많은 작은 돌과 같은 것인데, 미세 구멍속에 있는 작은 기포들이 돌비현상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번 가열한 액체를 재가열할 때에는 절대 사용한 끓임쪽을 재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이미 기포가 다 나와버렸기 때문에 추가로 기포생성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밤새 끓은 사골을 재가열할때 기포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와 같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경우에는 이런 끓임쪽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건더기가 없는 물을 심하게 가열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와 같이 돌비현상에 의한 폭발은 어떤 경우에도 생길 수 있기에 한식에 많은 오래 끓이는 탕이나 국종류를 조리 하실 때는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018년 2월22일자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되었던 칼럼입니다.)
‘없음'을 나타내는수 ‘0’
누구나 쉽게 사용하고 있는 숫자 ‘0’.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숫자이기에 그 의미가 무엇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0’이라는 기호와 그 의미가 친숙해진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0’라는 수의 의미는 대부분 ‘없다’라는 의미, 즉 ‘2 빼기 2’와 같이 어떤 수에서 같은 수를 뺐을 때 값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서양 수학의 역사속에서 인류가 ‘0’를 셈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자릿값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백이라는 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일의 자리와 십의 자리에 ‘0’을 두개 위치하고 그 앞에 ‘2’를 두어야 200이라는 수를 나타내어 2, 20 등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리값을 나타내기 위한 ‘0’의 역할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없다’라는 개념의 수를 사용하지도 않고도, 앞서 설명드린 자리값의 표현도 사용하지 않고도 수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요?
인류가 처음으로 수를 사용했었다는 증거는 1960년 벨기에의 장 드 브라우코르가 콩고의 이샹고(Ishango) 지역에서 발견한 뼈입니다. 원숭이의 뼈로 추정되는 이 뼈는 기원전 2만년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뼈에는 각기 길이가 다른 선 여러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포획한 동물의 수, 또는 날짜를 세기 위한 달력의 표시 등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각기 다른 주장들이 있지만, 그 선들이 무엇인가를 ‘세기’위한 수의 표시였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는 약 2만년전부터 수의 개념을 갖고 살기 시작했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고생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것이 약 600-200만년전,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약 20만년전인 것으로 추정되니 적어도 인간은 사람의 형상을 어느 정도 갖춘 이후로도 약 18만여년동안은 수를 셈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었던 미개한 동물이었던 것입니다. 이 후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셈의 체계를 발달시킵니다. 하지만, 이때의 셈이라는 것은 물물교환의 수단, 세금징수의 용도 등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 즉 음수와 같은 개념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빚을 지는 것을 마이너스, 즉 음수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빚을 얼마나 지었는가라는 표현만 필요할 뿐, 빚의 양은 양수로 충분히 표현이 되기 때문에 음수의 개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앞서 설명드린대로 자릿수를 나타내기 위한 필요성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대의 그리스나 로마 등의 숫자들은 십의 자리, 백의 자리 등을 표현하는 수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는 일의 자리, #는 십의 자리, 그리고 &는 백의 자리를 나타내는 수라면 432라는 수는 &&&###@@라고 표기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로마숫자 I, II, III, VI 등이 표현되었고, X가 십을 뜻하는 숫자로 23의 경우 XXIII으로 표현을 하면 되니 지금과 같은 자릿수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0’이라는 표현의 필요성을 가져온 것은 현재 우리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에서 비롯됩니다. 아라비아 숫자는 고대 인도에서 창안된 수체계입니다. 이것이 인도숫자가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리는 것은, 이후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에 숫자가 전파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 이슬람 지역에서는 인도를 의미한 힌두숫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 숫자는 1-9로 이루어진 아홉개의 숫자를 갖고 있었습니다. ‘없다’라는 수학적 개념은 있었지만, 초기에는 이를 표기하는 기호는 존재하지 않았고 산스크리트어로 ‘순야(Sunya)’라는 말로 ‘형상이 없음’, ‘빈 상태’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초기의 인도숫자는 자리값을 나타내는 수가 없었기 때문에 띄어쓰기로 자리를 표현했습니다. 즉, 2002라는 숫자는 ‘2 2’와 같이 두자리를 띄어쓰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띄어쓰기 간격이 일정치 않아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후, 4세기경 아리아바타(476-550)라는 인도 수학자의 저서에서 띄어쓰기대신에 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보였으며, 약 6세기정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인도 차투르부즈(Chaturbhuj) 사원의 비문에는 선명하게 ‘0’을 사용한 270이라는 수가 적혀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0’이 사용된 기록물로 남아있습니다. 이후 9세기경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 콰리즈미라는 페르시아인에 의해 유럽으로 처음 인도의 수, 즉 아라비아 숫자와 ‘0’의 개념이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10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가 전파되었을 때에도 유럽인들은 ‘없다’라는 개념의 ‘0’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유럽에 ‘0’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무려 수백년이 지난 1202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 1170-1250)라는 이탈리아 수학자가 아라비아 숫자와 그를 이용한 수학 교본인 산술교본(Liber Abaci)라는 책을 출판한 이후였습니다. 피보나치는 자신의 책에서 아라비아의 수 체계에 대해 ‘인도인들은 1,2,3,4,5,6,7,8,9라는 아홉개의 숫자와 ‘0’이라는 기호를 이용하여 가능한 모든 수를 표현할 수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피보나치 역시 ‘0’은 다른 숫자와는 다른 ‘기호’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왜 이다지도 ‘0’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까요? 사실 수학은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폭발적인 발전을 해왔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추상적인 것을 생각하기 전의 수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셈하는 역할만을 담당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세는 것이 전부였으니 보이지 않는 ‘음수’를 정의할 수도 없었으며, 그 사이의 ‘없음’을 의미하는 수, 즉 ‘0’을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음수는 인도수학에서도 7세기경 브라마굽타라는 수학자에 의해 언급되었으며, 이것이 ‘0’의 사용이 시작된 얼마 후인것은 분명 그 연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수가 서양의 수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00년대가 지나서야나 이루어졌으니 음수라는 개념이 현대와 같이 사용된 것은 불과 400여년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 수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좌표체계를 처음 만들어낸 데카르트(Rene Descarte, 1596-1650)조차도 음의 수는 잘못된 수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서양의 수학체계는 음수의 영역을 오랫동안 배척해 왔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와 대조적으로 동양의 수학은 음수의 개념을 매우 오래전부터 알고 사용해 왔습니다. 263년 중국 위나라의 유휘가 엮은 ‘구장산술’이라는 책에서 벌써 음수의 개념이 나오고 있습니다. 원래 이책은 1세기 무렵에 쓰여졌다고 전해지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여러 계산법을 설명하고 있는 수학책인데, 놀랍게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계산방법은 현대 수학의 행렬(matrix) 계산법과 동일하며 음수와 양수가 섞은 계산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동양수학에서 ‘0’의 개념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900년대 후반입니다. 그 시대가 인도에서 ‘0’을 사용하기 시작한 얼마 후이기 때문에 동양의 ‘0’의 개념도 인도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이미 그 이전부터 음수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자체적으로 ‘0’의 개념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구인류는 무시하고 현생인류가 생겨난 이후만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수개념을 제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현생인류가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하루, 즉 24시간으로 비유하자면 인류가 수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약 20분정도에 해당합니다. 그 짧은 20분만에 동물뼈 위에 잡아온 물고기의 수를 표시하던 인간들은 우주 밖으로 탐사선을 쏘아 올리고, 원자보다 작은 단위의 입자들의 크기와 질량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매스컴에서 터져 나오는 과학발전의 속도가 무섭습니다. 몇달 전까지만해도 신기술이라 칭송 받던 것들이 구기술 취급을 받는 것이 별 일이 아닌 세상입니다. 지난 “20분”에 이룩한 발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빨라졌고 또 더 빨리질 현대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로 앞으로 “20분후”의 인류는 과연 어디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해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해 집니다.
(2017년 8월24일 밴쿠버중앙일보에 기고되었던 칼럼입니다.)
“To every action there is always opposed an equal reaction : or the mutual actions of two bodies upon each other are always equal, and directed to contrary parts.”
“모든 힘은 반대 방향으로 동일한 크기의 반작용 힘을 갖는다 : 즉, 두 물체에 서로 작용되는 한 쌍의 힘은 언제가 동일한 크기이며 반대 방향을 향한다.”
기억이 나십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물리 수업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뉴튼의 역학법칙 중 제 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위에 영문은 실제 논문에 뉴튼이 직접 서술한 원문입니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우스갯 소리로 물리를 포기하게 만든 법칙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실제로 뉴튼의 세가지 법칙 중 가장 뜻이 모호하게 들리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 법칙을 처음 배웠을 때,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며칠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법칙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힘의 근본적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힘(Force)’이란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두 물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물리량입니다. 세상에 물체가 하나밖에 없다면 힘이라는 것이 애초에 정의가 불가능해 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힘을 ‘가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두 물체가 서로 ‘주고 받는' 힘으로 오해합니다. 마치 A가 B를 주먹으로 한대 때렸더니 화가난 B가 다시 A를 밀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작용, 반작용의 힘은 이렇게 주고 받는 힘이 아닙니다. 억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만약 A가 주먹으로 B의 복부를 때렸다면, 이는 B가 자신의 복부를 이용해서 A의 주먹을 때린 것과 동일한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라는 것이 작용, 반작용에 더 적합한 비유입니다. 어릴적 선생님들이 사랑의 매라시며 회초리를 드시고는 너희들을 때리느라 내 손도 매우 아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 많은 엉덩이로 선생님이 쥐고 있는 회초리를 너무 많이 때려서 그렇다는 말씀이신 것이지요.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입니다.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합니다. 분명 계란을 힘껏 던졌지만, 계란이 박살이 납니다. 계란과 바위 사이에 생기는 힘은 계란이 바위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며, 동일한 크기의 힘이 계란과 바위에 동시에 전달됩니다. 바위는 멀쩡하고 계란이 깨지는 건 단지 계란이 바위보다 약하기 때문일 뿐, 그것이 바위가 계란에게 더 큰 힘을 준 것은 아닙니다. 엊그제 일식(eclipse) 현상을 일으킨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을 하는 것은 잘 알고 계시다시피 지구가 중력(force of gravity)을 가하여 달을 잡아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구가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달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크기의 힘으로 말입니다. 같은 힘으로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데, 지구가 달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달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은 단지 달이 지구에 비해 매우 가볍기 때문입니다. 만약 달의 무게가 지구만큼이나 무겁다면, 지구가 달 주변을 도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쌍성(binary stars)이라는 항성계가 있습니다. 두개의 별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서로 중력에 의해 잡아당기는 계입니다. 마치 지구와 달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별, 즉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하나의 별이 다른 별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8자를 그리며 두 별이 함께 공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서로가 함께 만들어 내는, 그래서 서로에게 동시에 같은 힘이 걸린다고 해석할 수 있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 의한 현상들입니다.
어릴적 운동회가 열리면 이어달리기와 함께 운동회의 백미를 장식하던 것은 줄다리기였습니다.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긴 동앗줄을 잡아당기며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가 생각납니다. 줄다리기에서 줄 양쪽에 매달린 학생들이 잡아당기는 힘을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설명해 보자면, 줄을 잡아당기는 힘은 한쪽 팀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두 팀이 함께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힘을 A팀이 B팀에게 가하는 것이며, 동시에 B팀이 A팀에게도 가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야?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만약 한쪽 팀은 전혀 줄을 잡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반대쪽 팀만 줄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해보시면, 잡아당기는 힘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튼의 요상한 물리 법칙을 줄다리기를 이용해서 이해하려는 순간 더 이해가 안가는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양쪽이 줄을 잡아당기는 힘을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 두 힘이 서로 같을 수 밖에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한쪽 팀이 줄다리기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일까요?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동일한데, 왜 한쪽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해답은 두 팀에 상호작용되는 작용 반작용의 힘이 아니라, 힘의 균형에서 찾아야 합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힘은 크기가 같은 두 힘일뿐임으로 한 물체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 힘의 균형과 동시적으로 고려되어선 안됩니다. 대신 물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각각의 물체(팀)가 받는 힘만을 따져 봐야 합니다. 줄다리기 줄을 잡아 당기고 있는 한 학생만을 클로즈업해서 생각해봅시다. 반대쪽과 상호작용으로 만들어낸 힘(장력, tension)이 이 학생을 반대편으로 잡아 끌고 있는 동시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로 버티고 있습니다. 즉, 발과 땅바닥이 만들어내는 마찰력(friction force)에 의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버티는 마찰력보다 장력이 크다면, 끌려갈 것이고, 반대로 충분한 마찰력을 만들어 내어 버틸 수 있다면 상대편을 끌고 올 수 있는 것이 줄다리기에 숨은 물리 법칙입니다. 양팀이 비슷한 몸무게를 갖고 있다라는 전제 하에 두 팀이 줄다리기를 한다면, 강한 마찰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신발을 신고 있는 쪽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양팀이 몸무게의 합이 다르다면 마찰력은 물체의 무게와 비례하기 때문에 일단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팀이 어드벤티지를 갖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줄다리기의 승패가 줄을 잡아당기는 팔근육보다 버티는 다리 혹은 신발바닥의 마찰력에 더 좌우 된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리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 뒤에 숨어 있는 과학적 이론에 호기심을 갖고 추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큰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경우 위대한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의 엄청난 과학적 업적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로부터였던 것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에도 “왜일까?” 라는 과학적 사고를 함으로 느끼는 재미를 더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램을 해봅니다.
그런 날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일이 하나같이 꼬이고 점심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나를 향해 돌진을 해오는 듯 하다가 저녁 쯤에 가서 ‘설마 이것까지...’ 하는 것마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그런 날 말입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그런 운수 없는 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매운 음식을 찾는다고 합니다. 물론 술을 마신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술을 제외한 음식중에 이야기한다면 많은 분들이 매운 음식을 먹는다는 것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스트레스를 받은 날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매운 음식을 먹으며 괴로워 하면서도 동시에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좋아하는 아이러니한 장면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도대체 매운음식과 스트레스 해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정말 과학적으로 스트레스와 매운 음식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몸은 여러가지 호르몬들이 다양하고 즉각적인 육체적 스트레스와 감정 변화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우리에게 포괄적인 통증 혹은 고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신적, 감정적, 혹은 육체적 스트레스를 통틀어 말하는 넓은 의미의 정의입니다. 우리가 정신적, 감정적, 혹은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의 몸은 이를 ‘통증’으로 받아드립니다. 스트레스나 통증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 되면 우리는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우리 오감은 스트레스 자극을 받는 즉시 뇌에 있는 시상핵(Thalamic Nuclei)으로 스트레스, 즉 통증이 생겼다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시상(Thalamus)은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극들을 우리 몸을 중앙 관리하는 대뇌피질(Cerebral cortex)로 전달하는 곳입니다. 스트레스 자극이 보고 되면 중앙관리자인 대뇌는 이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게 됩니다.
엔도르핀의 원래 이름은 내인성 모르핀 (endogenous morphine)입니다. 이를 줄여 엔도르핀 (endorphine) 이라고 부릅니다. 모르핀은 보통 병원에서 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진통제입니다. 중독성이 강한 마약류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증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경우에만 처방됩니다. 의료기관에서 이용하는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처럼 진통효과를 갖고 있는 엔드르핀은 우리 몸에서 스스로 분비될 뿐 만 아니라, 그 효과는 1:1 비교시 대략 모르핀의 약 800배에 달하는 엄청난 천연 진통제입니다. 어느 학술지에 따르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에 최고의 고통 중 하나라는 산통을 겪는 산모에게서 엔도르핀의 분비가 최고조가 된다는 연구결과가 보고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엔도르핀은 통증이나 스트레스로 우리 인체가 쇼크상태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증세를 억제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운동을 하거나, 레저를 즐기는 것들 역시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의 입장에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엔도르핀이 분비됩니다. 이 때문에 엔도르핀의 분비를 적절한 운동 후의 즐거움에 의한 호르몬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와는 반대로 엔도르핀은 운동에서 생겨나는 통증을 줄여주기 위한 호르몬인 것입니다. 천연적으로 체내에서 분비되는 것이지만, 그 성분이 마약류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역시 중독성을 갖습니다. 격한 운동을 한 후 느낄 수 있는 쾌감때문에 운동을 계속하게 되는 운동 중독증, 번지점프, 스카이 다이빙 등에서 오는 스릴을 계속 즐기고 싶어하는 익스트림 스포츠 매니아들 역시 이러한 엔도르핀 분비에 대한 중독증세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 매운 음식을 즐기게 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가 됩니다. 매운 맛은 실제로 혀가 느끼는 통증과 관련되어 있고, 소화 기관내에서도 매운 기운에 의한 통증은 전반적으로 통증과 연결되어 엔도르핀 분비를 유발하고, 그로 인해 진통, 스트레스 해소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물질은 전쟁터의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아드레날린(adrenalin)입니다. 아드레날린은 엔돌핀과는 다르게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 아니고, 신장 위에 위치한 부신(adrenal glands)이라는 내분비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자 신경전달물질입니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은 하나의 세포에서 생성되어 다른 세포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호르몬은 중추신경계에서 분비를 결정하는 것과 달리 신경전달물질은 신경계 말단에서 생성되어 수용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물질을 말합니다. 아드레날린은 쉽게 말하자면 인체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 몸에 사용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그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에너지로 변용시키는 물질인데, 중추신경계에서 분비를 결정할 수도 있지만, 중앙으로부터의 보고체계를 무시하고 신경말단부에서 바로 분비될 수도 있는 물질인 것입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시작하면, 온 몸은 중추신경계부터 말단신경계까지 모두 전투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심박수를 증가시키고, 폐활량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혈액을 모든 근육들에 최대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비상체계를 구축하고, 통증이나 스트레스에 즉각적으로 필요한 생리현상이 아닌 소화기관의 활동량을 최소화하는 작용도 합니다. 매운음식을 먹었을 때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물론 매운 음식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아드레날린 분비의 부작용이 함께 하기도 합니다.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 분비가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음으로써 바로 이러한 호르몬들이 분비될 수 있다는 것인데, 왜 우리는 매운 음식을 먹어서 분비를 촉진하려고 할까요? 사실, 모든 일들이 처리되는 과정과 비슷하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대뇌피질을 자극해서 엔돌핀이나 아드레날린을 분비 하기까지는 여러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직접적인 통증이 가해지는 육체적 스트레스와는 달리 감정, 이성이 상황을 분석해 보려하기도 하고, 과연 이 상황이 정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인지를 인지해 나가는 과정이 이어지는 동안 직접적인 호르몬 분비는 늦어지게 됩니다. 매일 일어나는 스트레스가 그 날 따라 조금 더 있는 정도라면 대뇌피질을 자극하기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미 호르몬들이 분비되어야 하는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무뎌진 감각이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때 매운음식을 먹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매운 음식의 섭취는 직접적인 육체적 통증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자극보다 육체적인 자극은 훨씬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신호를 대뇌에 전달합니다. 캡사이신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음식을 먹고 매워서 어쩌지 못하는 상황을 극심한 통증으로 접수한 대뇌는 상황을 완화시킬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즉각적으로 분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저 드라마나 영화의 연출신, 혹은 흔히 우리가 하는 행동들의 이면에도 이런 생물학적 비하인드 스토리가 종종 담겨있습니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 하루종일 짜증으로 가득한 날, 눈물나게 매운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스트레스 해소 전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매운 음식을 남들보다 좋아해서 먹는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호르몬이라는 체내의 군사들을 불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보다는 적절한 운동이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여가활동을 즐겨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2018년 3월 8일에 밴쿠버 중앙일보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인공지능(AI)의 발달이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스스로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 우리는 전화기 속의 인공지능에게 오늘의 날씨가 어떤지, 그래서 우비를 입는 것이 좋을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수를 익혀서 인간을 상대로 바둑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이미 2년전의 흘러간 이야기입니다. 인공지능의 활용은 우리가 ‘머리를 써서’ 일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거나 용트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활용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 이면에는 앞으로는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실직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다국적 회계컨설팅기업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서 최근에 발표한 보고서는 지금부터 2030년 중반까지 인공지능의 발달이 전세계의 직업과 자동화 트랜드에 의한 변화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30여개국의 다양한 직업군에 속해 있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된 것이라고 PwC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른 현재 약 37%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지게 될 직업군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고 74%의 사람들은 그런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기술이나 정보를 배우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으며, 미래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사람들만이 안정된 직장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73%의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성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인공지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앞으로 2030년대까지 전세계 경제의 변화트랜드를 분석, 예측하고 있는데, 그중 직업군의 변화에 인공지능의 발달이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우선 앞으로 5-10년동안 인공지능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은 ‘금융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는 직업은 저학력자들이 종사하는 단순 노동에 관련된 직업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은 정확한 분석력을 요구하는 금융관련 종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초기의 변화일 뿐이고, 장기적으로 2030년대가 되면 저교육자들이 종사하는 직업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공장은 전체 라인을 감독하는 한두명의 사람들만으로 운영되는 것이 충분하며, 단순한 작업들은 모두 로봇들에 의해 대체 될 것입니다. 식료품점, 잡화점 등의 캐쉬어들도 가장 빨리 사라지게 될 직업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아마존이라는 기업에 의해 시애틀을 포함해서 북미의 몇몇의 도시에서 시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판매점의 경우, 물건을 고른 후 계산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게이트를 통해 지나가기만 하면 카트에 실려있는 물건들의 바코드를 컴퓨터가 전체적으로 읽어들여서 자동으로 이미 등록된 계좌에서 인출해 나가는 시스템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랜드를 이어서, 약 10여년 뒤부터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직업군은 운송 및 물류관련 산업이라고 보고서는 예측했습니다. 시험단계에 들어가는 자율주행차량들이 도입되면 우선 대중교통인 버스, 택시에 운전사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앞서 설명드린 물건을 구입하는 시스템은 대량의 물류창고에서도 도입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에 유통, 물류분야에서 속한 많은 단순 노동관련직들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또하나의 분야는 언어, 또는 언어교육관련 업종입니다. 이미 여행을 다니는 TV 프로그램들을 보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스마트폰의 번역 어플을 사용해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길을 찾아다니기도 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직은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이상하게 번역된 내용때문에 난처한 상황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웃고 즐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에러는 줄어들 것이고 동시에 여러 언어를 번역해 낼 수 있는 기술도 곧 대중화될 것입니다. 이런 통역, 번역기를 무선 이어폰처럼 귀에 꽂고 대화를 하면, 내가 한국말로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동시에 영어, 독일어, 일어등으로 번역되어 들리게 되는 기술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개발되어 있는 기술이며 머지 않은 미래에 상용화 또 대중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기술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모국어외에 다른 나라의 언어는 배워야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교육 관련 분야 업종에 큰 변화가 올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교육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일각에 존재합니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언어 공부는 줄어들겠지만 언어를 창조적인 일들에 도구로 활용하는 사람들, 즉 작가나 시인들과 같은 분들은 지속적으로 언어를 탐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 교육을 이어갈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많은 이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성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를 가능케 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기에, 가능하다하더라도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고서는 역시 인공지능의 발달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대체되지 않을 직업들은 창조성, 혁신성, 인간의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이라고 구분했습니다. 소통언어를 가르치는 업종보다는 언어를 매개로 창조성을 발휘하는 작가나 시인, 물리적으로 어려운 수술을 잘 해내는 의사보다는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 분석가나 상담사 등이 이런 업종에 속합니다.
앞으로 어떤 직업군이 유망할 것인가를 예측해보는 것은 그 시대에 사회의 주축이 될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더 민감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래도 안정적인’ 직업을 택할 것을 권합니다. 이미 그 시기를 보내보신 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이 가려고자 하는 길 앞에 다가올 어렵고, 힘든 미래가 보이시니 그보다는 안정적이고 편한 길을 선택하길 바라시는 지극히 당연한 바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길이 옳고 그르다라는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군이 과연 10여년이후에도 안정적일지는 요즘같은 급박한 변화하는 사회를 볼 때 예단하게 어렵습니다. 보고서가 말해주듯이 많은 저학력자들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동안 ‘안정적인 직업’ 이라고 각광 받았던 고학력자들의 직업군도 상당부분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하는 ‘교육’의 페러다임을 ‘안정’이라는 선에서 찾기보다는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흥미를 가지고 어떻게 더 창의성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발전시킬지에 두고 계획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가늠키 어려운 미래의 세상에 더 잘 적응하고 그 속에서 유능함을 인정 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성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석준영 원장님의 그외의 이전칼럼들은 밴쿠버 중앙일보 웹사이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